▲ 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세종 리더십이 재조명 받고 있다. 4월25일에 진행된 JTBC 주최 대통령선거 토론에서 손석희 앵커는 ‘가장 닮고 싶은 역사 속 인물이 누구인지’를 다섯 후보에게 물었다. 먼저 답변에 나선 심상정은 정도전, 홍준표는 박정희, 안철수는 세종대왕, 유승민은 정약용, 마지막으로 문재인은 세종대왕을 꼽았다.

여론 조사 1, 2위를 달리고 있는 문재인 · 안철수 후보 모두 세종대왕을 닮고 싶다고 말한 것은 우연인가? 그런데 이유는 조금 달랐다.

안철수 후보는 인사와 소통을 강조했다. 천민 장영실을 등용하여 과학기술을 발전시켰고, 백성들의 의견을 경청한 소통의 리더십을 언급했다. 문재인 후보는 소통을 강조했다. 세종은 조세 개혁을 하면서 17만 명의 백성에게 여론조사를 행한 이후에 실행했다며 국민과 눈을 맞추는 대통령이 되겠다고 말했다.

TV를 보면서 아쉬운 것은 두 후보 모두 세종(1397∽1450, 재위 1418∽1450)의 ‘통합 리더십’에 대한 언급을 안 한 점이다.

세종의 통합 리더십은 끌어안기와 권력분산이다.

첫째, 22세에 임금이 된 세종은 그 과정에서 배척당한 신하들을 끌어안았다. 대표적 인물이 황희(1363∽1452)이다. 황희는 태종 시절에 대사헌, 이조판서 등 요직을 두루 거쳤다. 그런데 1418년에 양녕대군이 폐세자 되고, 충녕대군이 세자로 책봉되자 국본을 쉽게 바꾼다고 반대하여 4년간 남원에 유배되었다.

1422년 (세종4년) 2월에 세종은 황희를 유배에서 풀어주고, 10월에 대간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의정부 참찬에 임명하였다. 태종이 승하한지 5개월 후였다. 황희는 승승장구하여 1426년에 우의정, 1427년에 좌의정, 1431년에 영의정이 되어 1449년까지 18년간 영의정을 했다. 1450년에 승하한 세종을 줄곧 보필한 것이다.   

둘째, 세종 18년에 세종은 태종이 왕권강화를 위해 도입했던 육조직할체계를 삼정승 중심의 의정부서사제로 바꾸어 왕권과 신권의 조화를 이루었다.

태종은 왕권 위협세력을 가차 없이 숙청했다. 1392년 4월에 조선 건국의 걸림돌인 정몽주를 죽이고, 1398년 8월에는 신권정치를 주장한 정도전과 이복동생인 세자 방석과 방번을 죽였다. 1400년 정월에는 넷째 형 방간도 제거하여 11월에 왕위에 올랐다. 

태종은 왕권강화를 위해 박차를 가하였다. 1405년에 태종은 의정부 기능을 축소하고 6조의 장관을 정3품에서 정2품의 판서로 높였으며, 좌·우 정승이 장악하고 있던 문·무관의 인사권을 이조와 병조로 이관시켰다. 1414년에는 육조직계제를 단행했다. 6조의 업무를 왕이 직접 관할한 것이다. 

그런데 1436년에 세종은 의정부 서사제를 부활시켜 육조의 업무를 의정부에서 심의하도록 삼정승에게 권한을 주었다. 그는 권력분점을 꾀했는데 이는 경륜 있는 황희와 맹사성이 있어서 가능했다.

이후 세종은 선택과 집중을 통해 창조 업무에만  매달려 1441년에 측우기 발명, 1443년에 훈민정음을 창제할 수 있었다.  그래서 세종은 ‘조선의 크리에이터’로 추앙받고 있다. 

19대 대통령의 과제는 무엇보다도 통합과 개헌이다. 누가 대통령이 되어도 여소야대인 상황에서 대통령은 협치가 불가피하다. 개헌을 통해 제왕적 대통령제의 종말을 고하는 권력구조 개편도 이루어야 한다.  따라서 새 대통령은 세종의 통합리더십을 배웠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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