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우 21세기선진포럼 ‘이순신장군역사 바로알리기’ 부회장 인터뷰

▲ 김상우 21세기선진포럼 '이순신장군 바로알리기' 부회장

이순신 장군(1545.4.28.~1598.12.16)이 대한민국의 심장부인 서울 광화문을 지키고 있다. 이순신 장군은 어린이가 존경하는 인물 1위다. 광화문에 이순신 장군 동상이 세워진 것은 19684.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일본이 가장 무서워할 인물의 동상을 세우라고 지시했다. 동상이 세워진 이후 고증과 관련 말도 많고 탈도 많았다. 칼의 위치 장군의 얼굴 왜곡 중국갑옷 거북선 논란 등이다. 이순신장군의 역사를 연구하는 시민사회단체인 ()21세기선진포럼 이순신장군 바로알리기광화문 이순신동상 재건립 3층 철갑 거북선 복원 등을 통해 왜곡된 역사를 바로 잡고, ‘성웅 이순신리더십을 통해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자고 주장한다.

올해는 이순신 탄생 472주년이 되는 해이다. 현재 한국사회는 위기다. 북핵과 안보가 걸림돌이다. 전쟁의 위협마저 흘러나오고 있다.

선조25(1592) 413일 일본 침공군 대선단이 부산에 도착하여 해안에 정박한다. 다음날 날이 밝자 일분군은 부산진성을 공격한다. 그날로 함락됐다. 이로써 장장 7년을 끈 대전쟁 임진왜란(1952.4.13~1599.11.19)의 막을 열린다. 53일 도성이 함락됐다. 선조는 도성을 버리고 도망쳤다. 개성까지 함락했다. 황해도까지 북진했다. 선조는 굴욕 속에 몽진에 성공했다. 풍전등화의 상황이다.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수군은 압도적 화력과 탁월한 전술로 일본수군에 음력 5월 사천해전에서, 6월 당포해전에서, 7월 한산도 대첩, 8월 부산해전에서, 다음해인 1953년 몽포해전에서 승리를 거두며 제해권을 장악한다. 일본군은 병력과 군수품 수송이 어려워져 곤경에 빠진다.

이순신과 원균의 불화가 문제가 된다. 1597년 이순신은 통제사직에서 해임된다. 한성으로 압송된다. 사형을 모면한다. 권율 장군 밑에서 백의종군한다. 원균이 칠전량해전에서 패배하면서 이순신을 다시 삼군수군통제사로 임명한다. 조선수군을 모아 정비한다. 함선은 12척 밖에 남지 않았다. 정부는 수군폐지명령을 내린다. 이순신은 신에게는 아직도 12척 배가 남아 있느니 내가 죽지 않는 한 적이 감히 우리 수군을 업신여기지 못할 것이라며 비장한 결의를 하고 1597109(음력829)에 진도 배파진으로 진을 옮긴다. 1025일 명량해협에서 12척의 배를 이끌고 나가 승리를 거둔다. 이 해전의 승리로 조선 수군은 나라를 위기에 빠트렸던 전쟁을 역전시킨다.

1598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어 일본군이 철수한다. 15981119일 새벽 노량해협에 모여있는 일본군을 공격해 승리한다. 하지만 왜군의 탄환에 맞아 전사한다. 이순신의 죽음과 함께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의 막은 내린다.

이순신 장군의 일대기이다. 이순신 전략은 세계 해군의 전쟁사에도 기록되고 있다. 가장 탁월한 장군이라는 평가다. 이순신과 관련 영화와 드라마가 많다. 하지만 이순신 장군과 관련한 역사적 고증과 문화재에 오류 또한 많다. 대표적인 것이 광화문의 이순신 동상과 거북선 복원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순신 장군의 역사를 연구하는 시민사회단체인 ()21세기선진포럼 이순신장군 바로알리기의 김상우 부회장은 <공정뉴스>와의 인터뷰를 통해 광화문 이순신동상 재건립 3층 철갑 거북선 복원 등이 필요한 당위성을 제기했다. 다음은 김상우 부회장과의 인터뷰다.

- 광화문 동상 교체 필요성을 주장한 이유는.

광화문은 대한민국의 중심이자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역사공간이다. 광화문의 이순신 장군 동상은 역사관을 확립하는데 중요한 역사 자료이다. 광화문의 이순신 동상은 1968427일 제막식부터 현재까지 말도 많고 탈도 많았다. 문화재 전문가들조차 고증 잘못을 지적하고 있다. 왜곡된 사실을 바로잡아야 역사가 바로 설수 있다.

- 잘못 왜곡된 부분을 지적해 달라.

광화문에 세워진 동상의 왜곡의 핵심은 칼의 위치다. 오른손에 칼을 들고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왼손잡이가 아닌 이상 칼을 뽑을 수 없는 모습이다. 이는 적에게 항복한 장군으로 오해받을 수 있다. 이순신 장군 시절은 전쟁 중인 상황이었다. 왼손에 칼을 쥐고 오른손으로 칼을 뽑는 게 논리적으로 맞다. 조각가 김세중이 참조했다던 이당 김은호가 그린 이순신 영정에도 칼은 왼손에 잡고 있다. 후일 김세중은 이순신 장군이 오른 손에 칼을 든 것에 대해 전시가 아닌 평화를 상징한다고 진술한다. 이말 역시 이해할 수 없다. 이순신 장군에게는 평화로운 일상이 없었다. 전쟁터에서 전사했기 때문이다. 단순한 작가의 불찰로 보기 힘들다. 광화문 동상을 제외하고 다른 동상, 혹은 영정 그림과 비교해도 이해할 수 없다. 때문에 바로 잡아야 한다.

- 칼의 위치가 중요한 이유는.

칼은 장군의 상징이다. 인류가 최초 사용한 무기는 돌멩이나 나무 몽둥이였다. 다음 단계는 돌멩이와 몽둥이가 결합한 형태의 무기다. 칼은 신석기 시대에 만들어졌다. 마제석검이 바로 칼의 원형이다. 칼은 가장 효율성이 뛰어난 무기였다. 인류가 멸망하는 날까지 어떤 형태로든 인간에 남아있을 유일한 물건이기도하다. 이순신 장군에게 칼의 의미는 거북선과도 연결된다. 칼을 만들기 위해선 쇠를 불에 달구어 두들겨서 만든다. 이 과정은 거북선의 벽면과 상판에 붙인 철판을 만드는 과정과 같다. 불에 달구어 칼을 만들 듯, 거북선 벽면에 붙인 철판들도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다.

- 이순신 장군의 갑옷은 중국 갑옷이라는 논란이 있다.

김세중은 이당 김은호가 그린 영정을 참조했고, 복식전문가인 석주선의 고증을 얻었다고 증언한다. 동상의 갑옷은 피박형 갑옷으로 망토형 방호구로 덮어쓰는 형태이지만, 조선식 갑옷은 두루마리처럼 입는 형태이다. 갑옷의 길이도 전쟁에 어울리지 않는다. 동상 제작이 객관적 고증 없이 진행됐음을 보여주고 있다.

- 이순신 장군 얼굴과 표준 영정의 얼굴이 다른가.

광화문 동상과 현충사에 걸려 있는 국가 표준 영정과 일치 하지 않는다. 현충사 영정은 1953년 월전 장우성 화백의 그림이다. 월전의 그림은 당시 화폐 100원 동전, 500원 지폐 등에 사용됐다. 이밖에 이당 김은호 화백이 그린 영정이 해남 좌수영, 한산도 제승당에 각각 보관되고 있다. 광화문 동상의 얼굴은 세 곳과 전혀 다른 얼굴을 하고 있다. 일각에서는 조각가인 김세중의 얼굴을 닮았다는 지적도 있다.

- 세종문화회관 지하에 전시된 거북선이 문헌과 다르다는 것은.

거북선은 귀선이라고도 부른다. 세종문화회관에 전시된 것은 거북선이 아니다. 귀선도를 현충사에 비치해 두고 엉뚱한 2층 구조에 나무 널판지로 만든 거북선을 임진왜란 때의 거북선이라고 전시하고 있다. 한마디로 아이러니다. 하루 빨리 철거하고 3층 구조의 철갑선으로 복원돼야 한다. 거북선에 대한 문헌은 이충무공종가유물도록 귀선도 28번과 29번에는 甲變爲臺(갑변위대), 三層加一(삼층가일), 鍊板列立(연판렬입), 雲水彩屛(운수채병)이라고 자세히 적혀있다. 이를 직역하면 장대(지휘탑)를 없애고 넓게 개조하고, 한 층을 더해 3층을 만든다. 여기에 연단한 철판을 늘려 배에 붙여 바다를 방어하는 파수꾼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연단한 철판을 넓게 개조했다는 뜻의 연판렬입(鍊板列立)널판을 줄지어 세우다로 잘못 해석했다. 조선왕조실록 등의 기록에는 거북을 한자로 옮긴 귀선(龜船)으로 적혀 있다.

임진왜란 이후 일본인들에게는 샤치호코(상상의 동물)와 닮은 보쿠카이센 혹은 깃카이센, 기카이센으로 불렸다는 설이 있다. MIT(메사추세츠 공과대학)는 거북선을 배 역사관에 인류 최초의 철갑선이라는 타이틀로 모형이 전시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학자들에 의해 잘못된 오역으로 인류 역사상 첫 철갑선인 거북선을 판옥선으로 폄훼하는 역사적 오류를 범한 것이다.

- 판목과 철갑 논란 속 거북선의 정체는.

이순신의 조카 이분이 작성한 <행록>과 임진왜란 이후 200년이 지난 1795년 편찬된 <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에 나와 있다. 배는 판옥선만하다. 앞에 용의 머리를 만들고, 그 꼬리 밑에 총구멍이 있다. 등에는 판자를 덮고, 판자 위에 총총들이 쇠못을 박았다. 다만 통행을 위해 좁은 십자로 길을 내었다. 좌우에 각각 6개씩 총구를 만들었다. 싸울 때에는 배 뚜껑 쇠못 위에 거적을 덮어 적이 뛰어들면 쇠못에 찔려 죽게 했다. 적이 옆으로 달려들면 전후좌우 총탄이 터져나간다. 무기로는 천···(天地玄黃) 각종 총통을 모두 사용했다. 적선 수백 척 속으로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다. 이는 이분의 행록에 나온 거북선에 대한 기록이다. 거북선은 기존 판옥선에 쇠판덮개를 한 3층 구조로 개조한 전함인 것이다. 쇠판덮개는 적의 화공에서 아군의 안전을 위한 것이다, 우천시에도 하포의 공격이 가능했다. 따라서 거북선은 내부 구조가 3층선이 되는 것이다.

- 이순신과 거북선 재해석이 중요한 이유는.

시대는 역사다. 돈과 가치로 따질 수 없다. 문화유산이다. 바른 문화유산은 미래 자산이다. 민족의 자긍심이기도 하다. 이순신 장군은 세계 해양인이 존경하는 인물이다. 이순신 리더십은 세계가 배우고 있다. 이순신은 전략과 지략이 뛰어난 군인이지만, 시대정신을 가진 리더였다. 만약 이순신이 없었다면 조선은 일제시대보다 훨씬 빠른 1500년대에 이미 식민지화됐을 것이다. 지금 세계 열강들은 자국의 이익을 위해 전쟁을 불사하고 있다. 한반도 역시 북핵과 사드배치 문제로 전쟁에 위협을 받고 있다. 이러한 어려운 시기를 극복하기 위해선 이순신 리더십이 필요하다.

- 이순신 리더십은 무엇인가.

국가에 대한 충성심이다. 바른 국가관이다. 그는 공과 사를 분명히 한 소통과 대화의 달인이었다. 420년 전 이순신의 역사 복원이 바로 시대정신인 것이다. 이순신 리더십과 거북선은 대한민국의 국방과학 문화재이다. 이를 문헌을 통해 올바르게 하루 빨리 원형상태의 거북선으로 복원해 후손들과 세계인들에게 보여주고 남겨야 한다. 이것이 우리가 사는 시대적 책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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