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길홍 공정뉴스 회장

필자는 1965년부터 중앙일간지의 정치부기자로 당시 야당을 출입하면서 마흔도 안된 제1야당의 원내총무 김영삼, 정책위의장 김대중 씨를 처음 만났다.

젊음과 패기가 넘쳤던 김영삼 씨는 모든 일에 앞장서는 리더형 정치인이었다. 정책통과 연설의 달인이었던 김대중 씨는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던 공부하는 정치인이었다.

50년전부터 숙명의 라이벌로 살아온 양김씨는 60년대 후반 박정희 대통령이 3선개헌을 준비할 즈음 야당안에서 “40대 기수의 정치돌풍을 일으킨 장본인이었다. 보선, 유진산, 박순천, 유진오씨 등 전통야당의 당수급 원로들을 설득해 40대의 젊은 정치인인 김영삼, 김대중 씨를 대통령후보로 내세워 경선하는 전당대회를 치루었다. 전통야당의 역사를 바꾼 계기를 마련했다.

경쟁과 협력의 승부에서 김대중 씨가 승리하여 70년 대선에서 공화당의 박정희 후보와 대결했으나 실패했다.

양김은 박정희 대통령의 장기집권의 길을 터놓은 3선개헌과 10월유신으로 계속 야당의 험난한 길을 같이 걸으면서 반독재 민주화투쟁을 함께한 평생의 정치동지였다.

평생 정치동지의 협력과 약속은 87년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이 출마한 대통령선거와 1990년 노태우 대통령 때 민정민주공화의 3당합당으로 지켜지지 않았다. 30여년 동안 군사정권 반대와 민주화 투쟁의 최전선에 나섰던 양대 거목은 이때부터 다른 길을 걷기 시작했다.

필생의 꿈이었던 대통령은 93년 김영삼 씨가 먼저 이루었고 김대중 씨는 98년 대통령 자리에 올랐다.

대통령 경쟁에서는 이긴 김영삼 씨는 올해 서거했고 다음 대통령인 김대중 씨는 2009년 서거했다. 이제 민주화의 영웅으로 추앙받는 양김의 정치는 끝났다.

김영삼, 김대중 전직 대통령 두 사람의 공과(功過)는 역사가 평가할 일로 남겨둬야 한다고 생각한다. 두 분 대통령과 같은 시대에 언론인, 대통령비서관, 국회의원, 치인을 지낸 필자는 역사의 산증인으로 두분 대통령을 현장에서 경험한 저널리스트의 입장에서 지켜보면 최근 우리 언론이 사실 분석과 객관적 평가보다는 찬양과 미화(美化)에 매달리는 듯한 느낌이다.

김영삼 전 대통령이 필담으로 남긴 유언이 통합과 화해라고 유족들이 전하면서 서거 후 도하의 신문방송은 온통 그것을 주제로 지면과 시간을 메우고 있다. 김영삼, 김대중 전 대통령은 통합과 화합의 정치를 표방했지만 실제는 이합집산(離合集散)은 물론 분열과 반목과 대립을 조장하는 정치역정을 수없이 반복했다.

야권 대통령단일후보의 정치협상에 실패하여 김대중 씨는 평화민주당 후보, 김영삼씨는 통일민주당 후보로 각각 출마하여 노태우 대통령의 집권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양 김씨가 정말 통합과 화해의 정치에 충실했다면 한국정치의 민주화는 10년은 앞당겨졌을 것이다.

역사와 언론은 이런 사실과 지적들을 간과하고 있는 것이 아쉽다.

대통령이 된후 통합과 화합의 정치 실현을 평가한다면 김대중 전 대통령이 후한 점수를 받았다. 그는 군사정권, 독재정권으로 비판받는 박정희 전 대통령과 전두환 전 대통령 시절 탄압과 고초를 제일 많이 겪은 야당정치인이었다. 박 대통령 시절 일본에서 중앙정보부가 강제 납치하는 과정에서 생명의 위협을 받았으며, 전두환 대통령 재임 때는 내란음모 혐의로 사형까지 선고받았다.

김대중 씨는 제15대 대통령이 된 후 과거정권의 대표적 인물을 응징하는 정치보복을 자행하지 않았다.

김종필 전 공화당총재와 연합해 정권을 잡아서 그런지 핍박했던 박정희 전 대통령 세력과 화해하고 용서하는 정치적 제스처를 보였다.

박정희 대통령 기념관을 설립하는 정부의 예산 편성을 지시하기도 했다. 사상과 이념으로는 전통보수와 등을 졌지만 통합과 화합의 정치 구현을 따지자면 분명히 김대중 전 대통령은 크게 기여했다.

반면에 최초의 국가장으로 영결식을 거행한 김영삼 전 대통령이 통합과 화해의 정치를 지향하고 실천했다는 평가에 대해서는 한 시대를 같이 살아온 정치인으로서는 좀처럼 동의하기가 어렵다.

갑자기 야당의 정치노선을 바꾸어 태생적으로 다른 정통 보수세력인 민정당, 공화당과 야합의 색채가 짙은 합당을 이룬 정치적 배경도 당시 국민의 공감을 얻지 못했다. 보수세력의 지원을 받아 김대중씨 보다 한발 앞서 대통령의 야망을 쟁취하려는 속셈이 드러났다.

호랑이를 잡으러 호랑이 굴에 들어간다면서 3당 합당의 고리인 내각제 합의를 파기한 행동이 그 속내를 드러내 보인 것이다.

대통령이 되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동물적 감각이 탁월하여 김대중씨를 제치고 “92년 제 14대 대통령 당선이라는 대권의 꿈을 달성했다.

노태우, 전두환 대통령의 추종세력이 3당 합당과 대통령선거의 협력을 거부했다면 김영삼 씨는 결코 대통령이 될 수 없었다는 것이 정가의 일반적인 해석이었다. 한국정치의 후진적 현실을 감안하면 현직 대통령의 위상과 업적을 높이기 위해 전직 대통령의 과오를 들춰내고 폄하하는 것은 감내할 수 있다.

다만 대통령을 만들어 준 전직 국가원수인 대통령 두 사람을 감옥까지 보내는 보복정치(?)의 연출에는 아연 실색하지 않을 수 없다.

YS는 그후 이에 대해 인간적으로 한 번도 유감과 화해의 표시가 없었다.

한국 속담에 은혜를 원수로 갚는다는 말이 있다. 역사 바로세우기의 정치적 명분은 앞세울 수 있으나 도덕정치의 유교적 가르침을 따르면 배신행위와 다름없다고 보여진다. 실제 9615대 총선에서 유교문화의 본거지인 TK(대구경북)지역에서 YS의 신한국당이 유일하게 고전한 것은 배신의 정치에 대한 심판으로 풀이 할 수 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이 통합과 화해의 정치에 최선을 다했는지 평가하기는 이르다. 역시 역사의 판단에 맡겨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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