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격호 롯데 총괄 회장

-'마천루의 저주'는 끝나지 않았다? 집안 싸움까지

-법학도를 '가정파괴범'으로 내몬 샤롯데, 롯데는?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읽어 본 사람이라면‘샤롯데’를 향한 베르테르의 아픈 사랑을 기억할 것이다. 베르테르는 사랑하는‘샤롯데’가 친구의 아내가 되어 버리자, 그녀를 향한 마음을 참지 못하고 가정불화를 일으키려다 실패한다.

그리고 자괴감과 실망감에 자살을 해버린다. 하지만 입장을 바꿔 생각해보면‘샤롯데’는 남편의 친구까지도 매혹해 가정불화의 씨앗을 제공하고 ‘누구보다 많이 배운’ 법학도를 자살에 이르게 한 마성의 여인이다. 그 이름을 이어 받은‘롯데’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 롯데’라는기업의마성은 가족을 불화로 밀어넣었으며 ‘누구보다 많이 배운’ 재벌 2세들을 뒤흔들고 있다. 그렇다면 과연 ‘롯데’를 키운‘신격호’는 어떤 사람일까? 샤롯데를 동경하여 기업에 ‘롯데’라는 이름을 붙였지만‘얌전한 법학도’였던 베르테르와는 달랐다.

누가 뭐래도 맨손으로 재계 5위의 기업을 키워낸 입지적인 인물인 것. 그의 성공기는‘신화’란 표현이 모자라지 않을 정도로 대단했지만 지금은 아들 손으로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게 됐다.

38엔들고 밀항한 소년

롯데그룹 총괄회장이자 롯데의 창업주인 신격호 회장은 공식적으로 1922년생이다. 그의 고향은 경남 울주군 삼남면 둔기리로 5남 5녀 중 맏아들이다. 일본으로 건너가기 전까지 경남도립 종축장에서 말을 돌보는 일을 하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던 중 1941년 고작 38엔을 들고 일본으로 밀항했다. 돈을 벌기 위해서다. 당시는 일제강점기시대였기 때문에 일본에 의한 갖은 멸시와 핍박이 자행되던 시절이다. 그런 상황에서도 신 회장은 지인의 자취방에 신세를 지며 신문·우유 배달 등 잡일을 닥치는 대로 해나갔다.

하지만 신 회장의 꿈은 돈을 많이 버는 것만이 아니었다. 몇 푼안 되는 돈이 생길 때마다 헌책방으로 달려가 문학의 꿈을 키우는 작가 지망생이었다. 특히 독일 작가 괴테의 열렬한 팬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결국 현실적인 한계를 느끼며 와세다대학교 화학공학과에 입학해 기술을 배웠다. 그가 대학을 졸업한 것은 1944년으로 일본의 패전 직전이다. 그 때 투자를 받아 사업을 시작한 그의 사업체는 미군의 공습으로 잿더미로 변해버렸다. 신 회장은 빚더미에 올라앉았다.

1945년 광복 이후에도 신 회장은 다른 사람에게 폐를 끼치고는 살 수 없다며 일본에 남았다. 그는 1946년 공습으로 폐허가 된 도쿄의 낡은 창고에 가마솥을 내걸었다. 비누와 크림을 만들어 팔았다. 이 사업이 크게 번창하면서 단 1년 여만에 첫 사업에서 진 빚을 모두 갚았다.

껌팔아 제계 5위까지 신 회장은 남은 밑천으로‘히카리 특수화학연구소’를 차린다.

유지류나 특수고무 같은 물질들을 연구해 껌을 개발했다. 이 껌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면서 신 회장은 본격적으로 투자자를 모집해 껌 회사를 차렸다.

1948년 신 총괄회장은 신주쿠 허허벌판에 종업원 10명의 주식회사 롯데를 탄생시켰다. 롯데라는 이름은 괴테의 소설‘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의 여주인공‘샤롯데’이름에서 유래됐다. 신 회장은 훗날“롯데라는 이름은 내 일생일대의 최대수확이자 최고의 선택”이라며 흡족해했다. 껌으로 시작한 롯데는 오늘날 재계 롯데그룹의 효시였다.

신 총괄회장은 껌 사업으로 큰 성공을 거두며, 롯데 상사, 롯데 부동산, 롯데아도, 롯데 물산, 주식회사 훼밀리 등 상업, 유통업을 망라한 일본의 10대 재벌이 됐다.

1965년 한일수교로 일본 기업이 한국에 대한 투자가 가능해지자 1966년 롯데알미늄, 1967년 롯데제과를 설립했다. 국내에서 라면과 과자로 종합 식품기업의 토대를 다져갔다. 그 뒤 한국에서도 사업을 다른 분야로 확장한다.

1973년 호텔롯데, 롯데 전자, 롯데 기공을 설립. 1974년 롯데 산업, 롯데 상사, 롯데 칠성 음료를 설립한다. 이외 한국 후지 필름, 대홍기획 등 건설사와 화학 공장 등 식품·유통·관광·건설을 아우르는 국내 재계 5위 종합 그룹으로 성장했다.

신 총괄회장은 1970년대부터 한국과 일본에서 사업이 점차 확장되자 홀수 달엔 한국에서, 짝수달엔 일본에서 머물며 셔틀경영을 펼쳤다. 이 때문에‘대한해협의 경영자’라는 별명을 갖게 됐다. 93세가 된 얼마 전까지 경영 일선을 지켜왔다.

마성의‘롯데’, 가정불화의 대명사?

신 회장의 사업수완은‘신화적’이었지만 가족사는 그렇지 못했다. 누구보다 아름다운 모습으로 화려한 자태를 뽐내던‘샤롯데’와 닮았다. 하지만‘마성’도 닮았다. ‘롯데’는 이성을 마비시켜 불화를 불러왔다. 실제로 신 회장은 남동생들을 모두 경영에 참여시켰지만 크고 잦은 분쟁이 이어지면서 동생들은 모두 분가했다. 남동생은 신춘호 농심그룹 회장, 신선호 일본 산사스 사장, 신정희 동화면세점 사장, 신준호 푸르밀 회장이다.

신철호 전 롯데사장은 1958년 신 총괄회장이 국내에 없는 틈을 타 서류를 위조하는 방식으로 롯데를 인수하려다 발각돼 구속됐으며 3남 신춘호 회장과는 현재 전혀 교류하지 않을 정도로 관계가 틀어진 것으로 알려졌다. 두 사람 사이의 앙금은 깊어 신춘호 회장은 아직까지 부친 제사에도 일절 참여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막내동생인 신준호 푸르밀 회장은 신 회장을 대신해 한국 롯데 경영을 실무적으로 총괄했으나 지난 1996년 서울 양평동 롯데제과 부지의 소유권을 둘러싸고 법정 소송을 치르며 2009년 사명을 푸르밀로 바꾸면서 롯데그룹으로부터 독립했다.

전범 조카와 2번째결혼

신 회장 본인의 가족사 역시 복잡하다. 신 총괄회장은 18세 때 노순화 씨와 결혼했다. 노씨는 현 롯데복지재단 이사장인 신영자 씨의 모친이다. 신 총괄회장은 노씨와 결혼을 한 상태에서 1941년 돌연 일본으로 건너갔다가 자신이 세 들어 살던 집의 주인 딸인 다케모리 하쓰코와 1950년 중혼을 했다.

두 번째 부인이 된 하쓰코는 1945년 9월2일 일본 항복 문서 조인식에 참석했다가 윤봉길 의사의 폭탄 투척으로 한 쪽 다리를 잃은 전범 시게미쓰 마모루의 조카다.

‘마천루의 저주’인가?

신 회장은 사업가로서 거의 모든 것을 이뤘다고 할 수 있지만 딱 한 가지 이루지 못한 것이 있다. 바로 세계 최고 높이의 테마파크를 짓는 것. 다시 말해‘마천루’다. 현재의‘제2롯데월드’가 이 결과물이다.

신 총괄회장이 제2롯데월드 사업을 구상한 것은 1987년부터였다. 당시 계획은 잠실 롯데월드 부지 옆에 108층 높이의 마천루를 짓겠다는 거였다. 1994년부터 본격적인 사업 준비를 했다. 하지만 공군기지 문제 등으로 난항을 겪다가 결국 2009년에서야 허가가 났다. 본격적인 마천루 건설에 들어갔다.

하지만 정말‘마천루의 저주’가 있었던 것일까?

제 2롯데월드 착공이후 사고와 잡음이 끊이지 않더니 결국 가정불화까지 터져 나왔다.

물론‘마천루의 저주’란 경제 붐 시기에 착공된 초고층 빌딩이 경제 순환주기를 넘기며 침체기를 감당하지 못한다는 이론이다. 하지만 현재 롯데 사태를 바라보면‘저주’라는 표현이 과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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