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박정희 대통령의 출생과 성장(상)

▲ 대구사범학교 졸업앨범의 박정희

신학문 교육을 고집한 박 대통령 부모의 선견지명

한 나라의 역사와 위상을 바꿔놓은 위대한 지도자의 출생과 성장을 살펴보는 것도 중요하다. 5천년을 가난에 허덕이던 한국을 선진국 수준으로 끌어올린 인간 박정희 대통령은 어떤 가문에서 출생하고, 어떤 환경에서 자라고, 어떤 교육을 받고 성장했는지 지금의 청소년들은 잘 알지 못할 것이다. 좌편향적인 전교조 교사들은 80년대 이후 지금까지 학생들에게 박 대통령을 민주주의를 탄압한 독재자라고 비난하고 한강의 기적을 창조한 경제개발의 지도자라고는 가르치지 않는다고 들었다. 한국의 역사가 왜곡되는 슬픈 현실을 바로잡고 후세들에게 올바른 역사를 가르쳐 주는 것이 우리 기성세대들이 담당해야할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박 대통령의 출생가문은 영남유림의 퇴락한 고령 박씨 문중후손이었지만 혁신유림(革新儒林)의 일파였다. 혁신유림의 계몽운동은 안동, 문경 등 경북 북부지역에서 서양의 신문화와 신사상을 받아들여 항일 의병운동과 별도로 전파했던 1900년대 신학문을 주축으로 삼고 있다. 유교사상이 투철했던 그시대 혁신유림은 인륜을 어지럽히고 기존질서를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서양의 신학문 연수와 자주독립의 의식을 자손들에게 고취하는 개혁의 세력으로 성장하는 것을 지향했다. 고령 박씨 가문의 배경과 박 대통령 집안의 가난한 형편을 감안하면 일제시대의 신학문 교육을 고집한 박 대통령 부모의 교육열이 보통이 아니었던 것 같았다.

▲대구사범 재학 시절 고향에서 어머니 백남의 여사와 함께 찍은 사진. 1920년 구미보통학교는 박정희가 1932년 대구사범에 입학할 때까지 단 한명의 합격자도 내지 못했다

191752녀중 막내로 태어나 큰형과 22살 터울

박 대통령은 1910년 한일합방조약이 체결된 7년 후인 19171117(930) 경북 선산군 구미면 상모동에서 출생했다.

부친 박성빈씨(46), 모친 백남의씨(45)의 사이에 5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장남 박동희(22), 2남 박무희, 장녀 박귀희, 3남 박상희, 4남 박한생, 2녀 박재희씨 다음이 박 대통령이다. 큰형 동희씨와는 무려 22살 터울로 태어났다. 생전에 박 대통령에게 직접 들었지만 박 대통령 어머니 백여사는 시집간 맏딸(귀희)과 같은 해 박 대통령을 임신했다 해서 무척 부끄러워했다고 한다. 임신을 알고 나서 뒤뜰에 있는묵은 간장을 몇 사발씩 먹고 높은 곳에서 몇 차례 뛰어내렸지만 소용이 없었으며 애를 낳으면 이불에 싸서 부엌에 갖다 버리라고 했다는 출생의 비밀을 얘기해주었다.

박 대통령 아버지 박성빈씨는 조선조 말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벼슬을 받았으나 척신의 행패와 부패정치에 환멸을 느끼고 반항해 동학혁명에도 가담했다. 1895년경 관군에 체포되어 처형직전 천운으로 사면 받아 구명했다고 한다. 아버지는 그 후 가사에 관심을 갖지 않고 술로 소일하면서 가산을 탕진하고 가세가 기울기 시작했다. 할 수 없이 외가의 선산이 있는 상모동으로 옮겨와 수원 백씨의 선산 위토 1600여평을 소작하면서 가사를 꾸려왔다. 어머니 백남의 여사는 봉건시대의 전형적 유림의 가문인 수원 백씨들이 상모동에 대대로 집성촌을 이루고 살아왔으며 조선조 초기 수양대군이 단종을 폐위시키자 일가가 벼슬을 마다하고 이곳에 낙향해서 세거(世居)한 것으로 전해왔다.

박 대통령이 출생한 상모동 마을은 1910년대 우리나라 농촌을 그대로 상징하는 가난한 동네였다. 이 마을의 선산 김 씨 몇 집만 부유한 편이었고 나머지 100여호의 주민들은 부락단위로 옹기종기 모여 턱없이 가난하게 살았다.

박 대통령이 태어난 사랑채 생가는 출생 한해전인 1916년 아버지가 손수 형들과 함께 초가집을 흙벽돌로 지었으며 지금의 안채는 5.16후 큰형 동희씨가 살면서 다시 건축했다.

아버지는 계속 밖으로만 나가고 집안 살림은 거의 어머니 몫이어서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양가집 규수로 태어나 고생을 모르고 시집와 7남매를 키우느라 모든 것을 다 바쳤다. 어머니 백여사는 가난에 허덕이면서도 셋째형 상희씨를 상모동에서 혼자 구미 보통학교에 보냈다. 박 대통령이 9살 되던 해 구미 보통학교에 입학시켜 마을의 학생은 모두 3명이었다. 어머니는 그만큼 자녀교육에 열성적이고 헌신적이었다.백남의 여사 교육열에 구미 보통학교 입학

상모동에서 학교가 있는 구미까지 거리는 8킬로 떨어져 시골에서는 20리 길이다. 걸어서 보통 2시간 정도 걸리는 거리를 박 대통령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6년 동안 도보로 왕복했다. 어린나이에 학교 다니는 것이 즐거움이 아니라 고생이었다. 박 대통령은 훗날 학교 다니는 나보다 더 고생하는 분이 어머니다. 시계도 없이 새벽 창살을 보고 일어나 새벽밥을 짓고 도시락을 싼 다음 나를 깨운다. 한겨울에는 세숫대야에 더운 물을 방안까지 갖고 와 잠도 덜 깬 나를 세수시키고 밥을 먹여 주셨다. 잠이 가시지 않아 밥을 먹지 않으면 꾸지람을 하셨다고 회고했다. 박 대통령은 어머니의 사랑을 많이 받고 성장한 탓인지 효성이 지극한 것으로 알려졌다. 박 대통령 형제들은 모두 체구가 건장하고 키도 컸지만 박 대통령만 체구가 작았다. 보통학교 시절 원거리 통학으로 신체발육에 지장을 받은 때문이라고 스스로 생각한 적이 있다고 했다.

당시 보통학교에 다니면 월사금 제도가 있었다. 한달에 60전 정도를 내야한다. 가난한 농가에서 매월 이를 내는 것도 큰 부담이었으나 형편이 어려운 어머니 백 여사는 쌀과 달걀을 팔아서라도 월사금과 적은 용돈을 알뜰하게 마련해줬다고 한다.

박 대통령은 78년 청와대 기자단과의 오찬에서 구미보통학교에 다니던 시절을 들려주었다.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겨울 늦은 오후 집에 돌아가는 길에 꼭 거쳐야할 솔밭길을 지날 때면 가끔 산늑대가 나타난다는 얘기에 겁을 먹고 빨리 지나다녔던 일을 회상했다.

동네입구까지 나와 기다리던 어머니가 왜 이렇게 늦게 오느냐 하시면서 어머니 목도리를 벗어 자신에게 둘러 주시던 잊을 수 없는 모정을 회고했다. 또한 박 대통령이 학교 다니던 때는 춘궁기인 봄이 되면 끼니를 제대로 채우지 못하고 학교와 집 그 먼길을 오가면 뱃가죽이 달라붙을 정도로 배고프게 살았던 과거를 뚜렷하게 기억했다. 근검절약해 우리시대에 한번 잘 살아봐야 하지 않겠느냐면서 출입기자들에게 강조했던 경험담이 새삼 떠오른다.

박 대통령은 19264월 구미 보통학교에 입학하여 19323월 교과 11개과목을 만점을 받고 졸업했다. 256학년은 우등상을 받았다.

계몽교사의 꿈 키우면서 명문 대구사범학교 진학

박 대통령은 193245년제 대구사범학교에 입학했다. 일제가 설립한 대구사범은 가난하고 머리 좋은 영남지역의 수재들이 모여든 교원양성 기관이었다. 그 시절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하면 보통학교 교원으로 발령 받고 생계가 보장되는 좋은 직장이었다.

1920년 구미 보통학교가 개교했지만 20여 년 동안 졸업생 단 한명도 대구사범에 진학하지 못했지만 박 대통령은 그해 입학시험에서 100명중 51등으로 합격했다.

재학중 박 대통령의 성적은 5년간 중하위를 맴돌았다. 15세에서 20세에 이르는 대구사범 5년은 평생 사회생활을 영위해 나감에 있어 인격형성의 중요한 시기였으며 교우와 인맥을 두텁게 하는 청년기였다. 박 대통령의 대구사범 선후배 다수가 일부는 대학으로, 일부는 중고교 교사로, 일부는 교육행정에 참여해 해방 후 한국교육계를 주도했다. 재학 중 스승은 교련주임 일본인 아리카와 중좌, 조선어 교사 김영기, 한문교사 염정권, 교육학 교사 박관수와 김용하(대우그룹 전 회장 김우중의 아버지)등이며 일본인 재학생도 있었다. 박 대통령 대구사범 동기생으로는 이미 알려진 것과 같이 서정귀(호남정유 사장), 황용주(전 문화방송 사장), 권상하(전 대통령 민정비서관), 조증출(전 문화방송 사장), 왕학수(전 부산일보 사장), 이성조(전 경북 교육감), 김병희(전 인하대학장), 장병엽(납북, 전 서대문경찰서장)등이다. 이 가운데 학교 기숙사에서 같이 생활한 서정귀씨와 왕학수씨 등은 저도 하계휴양지에 박 대통령이 머물 때 이곳에 들러 친구로서 잠시 함께 휴식하는 모습을 본적이 있다.

일반적으로 박 대통령이 외부에 알려지기로는 성격이 단호하고 냉정하며 독선적이라는 평가를 많이 받았다. 가까이서 지켜보면 수줍음을 많이 타고 남을 여러모로 배려하며 말수가 적어 내성적이다. 박 대통령은 어린시절 학교에 다닐 때는 사교성이 적었다는 것이다. 박 대통령은 대구사범 재학중 동기생들과 처음으로 도움을 주고 받고 깊이 사귀면서 사회성을 기르고 인간관계를 넓혔다고 해야할 것 같다. 대구사범 시절 성적은 매번 꼴지 수준이었으니 쓴맛 단맛을 모두 경험했다. 이 것이 훗날 대통령으로서 바닥 민심과 사람의 눈치를 살필 줄 아는 지도자로 성장하는 밑거름이 됐는지 모른다. 다시 말하면 가난하고 평범한 시골 출신의 배운 엘리트일지라도 인간을 차별하는 우월의식을 배격하고 평등사상을 키웠다는 것이다.

박 대통령은 대구사범 학창시절 문필과 서예의 창작능력도 뛰어났다. 금강산 기행문도 쓰고 교우회지에 시작도 발표하는 실력도 보였다. 19365학년때 하루를 지내더라도 저 태양처럼 하룻밤을 살더라도 저 파도처럼 느긋하게 한가하게 가는 날을 보내고 오는 날을 맞고 싶다라는 마지막 구절의 대자연이라는 제목의 시를 교우회지에 기고했다. 재학시절 붓글씨, 검도, 산문과 시작, 사격, 육상, 기악 등 교사자질에 걸맞는 취미생활이 다양했다. 아마츄어의 경지를 넘어선 붓글씨는 대통령이 된후 언론에 배포되는 신년휘호, 복원 문화재 현판, 대형공장 준공기념 휘호 등 수려한 솜씨의 수많은 유작들이 전해오고 있다.

▲문경 서부공립심상소학교(문경보통학교)교사로 부임한 박정희는 여학생들에게 인기가 있었다.박정희 오른쪽에 있는 강신분은“선생님이 워낙 착실하여 일본인 교사들과도 원만한 사이였다’고 회상했다.(1937.4.1)

스무살 젊은 나이의 문경 보통학교 초임교사 시절

박 대통령은 19374월 문경 서부공립심상소학교(문경보통학교)의 초임교사로 발령받고 부임했다. 수무살 나이에 교사로 부임한 시골 농촌의 보통학교에는 박 대통령과 엇비슷한 또래의 나이먹은 학생들도 많이 섞여 있었다.

박 대통령은 3년 동안 문경에서 근무하면서 대구사범 한국인 은사로부터 배운 전인교육을 학생들에게 가르쳤으며 조국을 잃은 설움과 자주독립의 민족혼을 깨우치고 심어주려고 심혈을 기울였다. 청년 교사 박정희에게 배운 한 여제자는 문경새재 입구의 하숙집 벽에 프랑스 영웅 나폴레옹의 사진을 걸어 놓았다는 얘기를 전해 주었고 봄소풍을 갔다가 물에 빠진 한 학생을 홀로 연못에 뛰어들어 구해 인공호흡을 시켜 살려놓았다는 사실도 털어 놓았다. 박 대통령은 보통학교 초임교사로서 배우고 갖추어야 할 기본 소양과 실력을 갖추고 나름대로 학생들을 인간적으로 따뜻하게 대해주고 도덕공부와 가정방문 등을 통해 학생들의 인격도야에 게을리하지 않았다고 늙은 제자들은 회고했다. 이렇게 교사생활에 충실하려고 애썼지만 박 대통령은 시골학교 교사의 현실에 안주하지 못하고 고민하는 모습을 가끔 보인 것으로 외부에 비춰졌다. 박 대통령의 처음 직장이었던 문경보통학교 교사는 인생의 최종 정착지는 아니라는 것이다.

박 대통령은 학교수업이 일찍 끝나 무료하고 우울할 때면 혼자 문경보통학교 뒷편에 우뚝 선 주흘산에 혼자 나팔을 들고 자주 올라가는 광경을 동네사람들이 지켜봤다. 주흘산 깊은 계곡과 정상에 올라 대구사범 때 익힌 나팔을 무작정 불어대거나 때로는 혼자 포효하는 목소리도 들었다고 한다. 이같은 행동은 박 대통령이 품은 청운의 뜻을 펼치기에는 아무래도 문경보통학교는 만족할 수 없는 직장이라는 사실을 스스로 인정하는 제스츄어일 것이라는 후일담이 문경에서 전해온다.

대구사범의 박 대통령보다 4년 선배되는 필자의 선친이 62년경 문경서중학교 교장으로 재직하는 동안 문경주변의 여러 사람으로부터 청년교사 박정희에 대한 얘기를 들었다고 하셨다. 성품이 과묵했으나 책임감이 강해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에 성심성의를 다했다고 한다. 여학생들에게는 공부 잘해서 훌륭한 조선여성이 되기 바란다고 당부하고 풍년이 들어 잘살기를 기원한다면서 살림이 어려운 학생들의 가정형편을 자상하게 염려해주는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제자들은 부임 3년 만에 문경을 떠난 박 대통령을 사뭇 아쉬워했으나 20여년 후 한국의 대통령이 된 박정희 선생님을 보고 크게 환호했으며 박 대통령이 교사시절 하숙했던 초가집의 턱 높은 방 한 칸을 유지 보수하여 지금까지 관광객들에게 개방하고 있다.

▲일본육사 3학년 생도 박정희. 선산출신 후배인 김익교(당시 일본 주오中央대학생. 왼쪽)김숙교(당시 고교생)와 함께 찍은 사진이다.

만주군관, 일본육사 등의 일본군 행적 친일 비판 감수

교사 박정희가 문경을 떠날 때는 시골의 많은 유지, 학부모, 학생들이 버스정류장에 나와 배웅하면서 이별의 아쉬움을 달랬다.

고향 구미를 떠날 때는 어머니 백 여사가 늙은 에미를 두고 왜 그 먼 곳까지 가느냐면서 말렸다. 박 대통령은 당시 만주 목단강성의 만주군 군관학교 제2기시험에 응시했다. 만주군관학교는 만주계 반, 일본계 반을 뽑았다. 박 대통령은 19404월 만주계 합격자 240명 가운데 한국인 11명과 함께 15등으로 합격했고 5.16 당시 군사령관이었던 이한림 장군은 20등으로 뽑혔다. 만주군관 출신 조선인은 김묵, 이재기, 이상준, 이재기, 강창선, 김재풍등 48명 정도이며, 이중 10여명은 5.16을 지지했고 10여명은 좌익으로 기울어 여순반란 사건 때 숙군된 것으로 알려졌다. 그후 박정희 대통령은 군에서 좌우익을 모두 경험하면서 살아났고 결속력이 유명했던 만주군관 조선출신 군인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당시 만주는 동양의 서부로 불려질 만큼 야망에 불타는 군인과 관료, 만주철도를 건설한 세계적 공학 두뇌집단, 일본조선한족만주족몽골족 등의 잡다한 민족이 뒤엉켜 사는 기회의 땅으로 둔갑해 좌충 우돌하는 대륙의 요충지였다. 박 대통령은 사기, 마약, 첩자, 음모, 살인, 야만, 방화 등을 일삼는 군상들이 설치는 만주지역에서 단련을 받았다. 젊은 박정희는 온갖 시련과 고난을 감내하면서 곁눈을 팔지않고 군인의 외길을 포기하지 않았다.

19423월 만주군관학교 졸업식에서 푸이 만주국황제로부터 우등상을 받았다. 그 후 4월 관동 군부대에 배속받고 군생활을 시작했다. 바로 그해 10월 박 대통령은 만주군관 동기생 이한림, 이섭준, 김재풍 등과 함께 일본육사에 편입해 19444월 졸업했다. 군사 훈련교육과 병영생활을 대부분 만주지역에서 했으며, 일본 관동군과 만주군 보병사단에서 복무하다가 해방되던 457월 중위로 진급했다. 8.15 해방으로 일본이 패망한 후 박 대통령은 9월 군생활을 같이 했던 이주일(전 감사원장), 신현준 등과 함께 만주에서 중국 베이징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일본군, 만주군 출신 조선인 장병들 일부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산하의 광복군 제3지대 주평진대대로 편성됐다. 박 대통령은 제2중대장을 임명받고 광복군으로 편입했다.

박 대통령의 젊은 시절 이같은 일본군 복무행적을 두고 진보. 좌익 진영에서는 친일파로 매도하고 있다. 36년간 주권을 강탈하고 일본의 지배를 받았던 우리로서는 박 대통령도 그렇게 생각했겠지만 결코 부끄러운 과거인 것은 분명하다. 박 대통령의 친일 및 좌익 전력 등은 역사의 평가에 맡겨야 한다. 살기 힘들고 가난했던 일제 강점기를 보통사람으로 살아가야 했던 외로운 지식인, 인간 박정희의 피맺힌 고뇌와 잘못을 너그럽게 용서하는 아량과 이해가 아쉽다. 박 대통령이 한국 역사에 미친 공()이 과()보다는 훨씬 크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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