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보다 진한 라면국물 전쟁 “원조는 辛家라면”

신격호 롯데그룹 회장

“감히 내 밥그릇에 탐을 내?”

재산을 둘러싼 재벌가의 법정 싸움은 재계의 단골메뉴다. 삼성, 현대, 두산, 금호, 한진, 롯데 등 ‘쩐의 전쟁’을 거치지 않은 로열패밀리는 없을 정도. ‘형제의 난’ ‘모자의 난’ ‘숙부의 난’ 그 종류도 다양하다. 주거니 받거니 서로 일감을 몰아주며 진한 우애(?)를 나누다가도 자신의 밥그릇에 손끝하나라도 스치기라도 하면 그 순간부터 애증의 관계로 변모한다. 이를 두고 일각에서는 경영권 세습을 위한 재벌가의 통과의례라도 한다. 이에 [한국증권신문]은 유난히 ‘피’보다 진한 재벌가의 치열했던 ‘쩐의 전쟁’의 내막을 다시금 재구성해본다. 그 네번째 주인공은 유통공룡 롯데가 형제들의 반세기 가까이 이어오고 있는 팽팽한 기싸움, 그 첫번째 이야기다.

맨주먹 하나로 현해탄을 건너가 한국과 일본 양국에 거대 기업을 일으킨 신격호 롯데 총괄회장. 아흔이 넘은 고령에도 여전히 현장을 누비며 진두지휘하는 그의 경영 리더십은 불황 속에서도 빛이 날 만큼 높이 평가 받고 있다.

1922년 경북 울주군 삼남면 둔기리 시골마을에서 신진수·김필순씨의 5남5녀 중 첫째로 태어난 신격호 회장은 백부의 도움으로 간신히 보습학교에 다닐 수 있었을 만큼 집안 형편이 넉넉지 못했다.

1940년 18살에 같은 마을 부농의 딸인 노순화씨를 아내로 맞은 지 1년도 채 되지 않아 일본으로 홀연히 떠난 것도 돈을 벌어 성공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기 때문이다. 당시 신격호 회장에겐 장녀인 신영자 롯데 장학복지재단 이사장이 있었다. 하지만 처자식마저도 그의 성공 의지를 꺾을 순 없었다.

신격호 회장은 일본에 도착하자마자 일단 생활비를 벌기 위해 우유배달을 시작했다. 눈이 오나 비가 오나 하루도 거르지 않고 배달일을 성실히 해냈다. 그리고 그의 부지런함은 오늘날의 롯데가 재계 5위 거대기업으로 우뚝 서는데 모태가 된다. 그의 성실함에 탄복한 일본인 친구가 껌 사업을 권유하면서 신격호 회장이 본격적인 사업에 뛰어들었기 때문이다.

껌 사업은 대성공이었다. 한국전쟁 발발과 맞물려 날개 돋친 듯이 팔려나갔다.

하지만 신격호 회장의 사업 성공이 신씨일가의 우애에 크나 큰 균열을 예고하면서 끝을 모르는 ‘분쟁’의 소용돌이를 거듭한다. 한일 국교가 수립되기 전, 일본 기업이 국내에서 사업과 투자를 할 수 없었던 까닭에 선친과 동생들의 이름으로 국내사업 기반을 다진 것이 빌미라면 빌미였다.

‘경영권 다툼’은 기본, ‘라면전쟁’ ‘소주전쟁’ ‘부동산전쟁’ ‘로고전쟁’ ‘관광전쟁’ 등 2세에까지 불협화음이 이어졌다. 많은 형제, 자식 수만큼이나 분쟁에 함께 하지 않은 이가 없을 정도였다.

이는 1958년 5월 신격호 회장이 자본금 150만원으로 한국에 롯데를 설립하면서 시작됐다.

‘롯데제과’ 두고 장남과 차남 대립

신격호 회장은 한국롯데를 설립하면서 4명의 남동생들에게도 경영권을 나눠줬다. 차남 신철호 전 롯데 사장, 3남 신춘호 농심 회장, 4남 신선호 일본 산사스 회장, 5남 신준호 푸르밀 회장에게 똑같이 경영권을 배분했다.

하지만 1966년 5월, 바로 아래 동생인 신철호 사장이 재산을 독점하려고 회사 돈을 가로챈 사실이 들통 나면서 신격호 회장과 대립 구도를 형성하기 시작한다.

신철호 사장이 롯데제과의 전신인 롯데화학공업사를 설립하기 위해 신격호 회장과 신춘호 회장 등의 도장을 위조해 이사직을 사임한 것처럼 이사록을 꾸며 명의를 변경한 후 당시 롯데의 전 재산인 4억 2000여만원의 공금을 가로챈 것.

결국 신철호 사장은 업무상 횡령 및 사문서 위조 혐의로 서울지검에 구속되기 이른다.

그러나 형제들과의 원만한 화해로 신철호 사장은 선고유예를 받는데 그친다. 이후 신철호 사장은 롯데 관련 사업에서 손을 떼고 메론제과를 설립, 경영을 맡아오다 건강악화로 1999년 세상을 떠난다.

신격호 vs 신춘호 “라면이 뭐길래...”

롯데가의 불꽃 튀는 ‘쩐의 전쟁’은 1965년 농심의 전신 롯데공업이 설립되면서 본격화됐다.

맏형인 신격호 회장 밑에서 그림자처럼 돕던 3남 신춘호 회장이 신격호 회장의 반대를 무릅쓰고 한국에 돌아와 자본금 500만원으로 롯데공업을 설립, 이때부터 두 형제 사이에 틈이 갈라지기 시작한다.

“한국에서 망할 것”이라는 신격호 회장의 만류에도 신춘호 회장이 끝까지 자신의 이름으로 회사를 설립해 ‘롯데라면’을 출시, 신격호 회장의 심기를 건드렸다. 신춘호 회장 또한 끝까지 형의 지원을 받지 못하자 신격호 회장에 대한 서운함 감정이 쌓여갔다. 그렇게 두 형제의 돈독했던 관계는 반전을 맞이하며 악화일로를 걷는다.

신격호 회장은 보란 듯이 1967년 롯데제과를 설립해 롯데그룹의 토대를 닦아 나갔으며 롯데공업은 “형님 먼저, 아우 먼저”라는 광고카피로 유명한 ‘농심라면’의 대히트로 78년 회사 이름을 ‘농심’으로 변경, 독자노선을 걷기 시작한다. 이후 롯데는 재계 5위로 농심은 라면업계 1위 자리를 점령, 승승장구 한다. 하지만 그럴수록 두 사람의 사이는 더욱 요원해져갔다.

심지어 신춘호 회장 고희연에 형인 신격호 회장이 참석하지 않음은 물론, 서로의 행사에 얼굴을 내비치지 않았다. 부친 제사마저도 신춘호 회장이 발걸음 하지 않는 등 시간이 지날수록 앙금은 깊어갔다.

2000년도에는 농심이 신세계의 대표이사였던 권국주씨를 농심 유통업체인 메가마트와 호텔 농심 대표이사로 전격 영입하면서 신격호 회장의 신경을 건들이기도 했다. PB브랜드 강화 등을 위해 의류제조업체인 메가코디를 설립하기도 했다. 신격호 회장이 롯데제과 영토확장에 나서자 유통업과 호텔업에 적극적인 의지를 나타낸 것이다.

끝나지 않는 원조전쟁

그러던 2009년 신격호 회장이 ‘라면’ 업계에 뛰어들면서 신춘호 회장과의 ‘라면 전쟁’이 뜨거워진다.

신격호 회장이 농심의 라이벌인 삼양라면과 손을 잡고 롯데마트를 통해 PB제품 ‘이맛이 라면’을 출시, 신춘호 회장의 속을 긁었다. 비록 업계 절대강자인 농심 신라면을 뛰어넘지는 못했지만 그 존재만으로도 본격 ‘라면 대전’을 예고하기 충분했다.

그리고 1년 뒤 신격호 회장은 “라면의 원조는 롯데”라며 ‘롯데라면’을 전격 출시, 파란을 몰고 온다. ‘롯데라면’은 농심의 뿌리나 다름없는 제품으로 그 이름이 갖는 상징성이 크기 때문이다.

신춘호 회장은 애써 태연한 반응을 보였다. PB상품의 한계가 있기 때문에 실패할 확률이 크다고 자신했다.

하지만 ‘롯데라면’이 농심 라면에 비해 가격면에서 5% 가량 저렴한데다, 워낙 강력한 유통망을 가지고 있어 위협적이었다. 초기 주간 평균 50만개가 팔리며 돌풍을 일으켰고 롯데마트에서 삼양라면을 제치고 판매량 2위를 기록하기도 했다.

이를 두고 일각에서는 롯데가 삼양식품을 인수해 농심의 목을 죄는 것 아니냐는 관측까지 나돌았다. 시기의 문제일 뿐, 인수대상으로 삼양식품이 될 공산이 크다는 의견이 우세했다. 삼양식품의 실적이 정체에 있는 데다 롯데가 계속해서 라면사업에 열을 올리고 있다는 이유에서다.

최근에는 또 농심 매출의 10%를 차지하고 있는 ‘삼다수 유통’에 신격호 회장이 관심을 보이고 있어 두 사람의 총성 없는 전쟁이 반세기를 향해 달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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