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영수 여사 서거 40주년 특집 의혹 해부<1>

- 한일관계 풀리지 않는 숙제...문세광의 대통령 암살 사건 배후론
- 74.8.15. 재일동포 문세광 광복29주년 기념식장서 대통령 암살 시도

 
북한·일본의 ‘오월동주(吳越同舟’가 시작됐다. 한·중 협력이 긴밀해진 가운데 일본은 북한과 핫라인을 개설하며 북한과의 외교관계에 속도를 내고 있다.

아베신조 일본 총리는 지난 7월 3일 일본인 납북자 문제와 관련, 북한과 약속한 제재 해제를 단행하기로 했다.

앞서 지난 5월26∼28일 북한과의 스톡홀름 회담에서 북한이 납치 재조사에 착수하는 시점에 인적왕래, 송금, 인도적 목적의 북한선박 왕래 등 대북 제재를 해제하기로 한바 있다.

이로써 대북 제재에 대한 국제사회의 균열 조짐이 시작됐다.

북한은 이 틈을 더욱 키우려는 의지를 드러내고 있다. 반대로 한·일간의 갈등은 점차 벌어질 전망이다.

재일 한국인들은 74년 8월 15일 광복 29주년 기념식에서 재일교포 문세광의 총에 맞아 사망하면서 한일관계가 악화됐던 당시로 돌아가지 않을까 하는 우려를 제기했다.

올해로 육여사 서거 40주년을 맞아 문세광 저격 사건과 관련한 풀리지 않은 실타래를 재해석한다.

 
1974년 8월 15일.

서울 남산 국립극장에서 열린 광복 29주년 기념식장. 오전 10시 6분에 박정희 대통령 내외의 입장을 알리는 장내 방송이 흘러나온다.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가 무대 오른쪽에서 나온다.

모두 기립해 박수로 맞이한다.

박 대통령은 오른손을 들어 박수에 답례했다. 오렌지색 한복을 입은 육 여사는 활짝 웃음을 머금고 목례했다.

10시 13분. 대통령이 연설대 앞으로 나와 경축사를 읽어 내려갔다. 10분 뒤인 10시 23분. 대통령이 “조국 통일은 반드시 평화적인 방법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다시 한번...”이라는 대목에서 관객석 뒤쪽 해외 교포석 끝에서 검은색 양복에 안경 쓴 괴청년이 불쑥 일어났다.

그는 무대 쪽 복도로 5m가량 뛰어나가더니 무대를 향해 오른손을 들었다. 권총이 들려 있었다. ‘탕’ 하는 금속성 두 발이 장내를 뒤흔들었다.

대통령은 계속 경축사를 읽어 내려갔다. 단상의 경호실장 박종규가 일어서며 무대 앞으로 달려 나와 총을 뽑아 들었다. 총소리와 비명소리가 뒤섞이며 장내는 아수라장이 되었다.

범인은 다시 15도가량 경사진 통로를 17∼18m가량 뛰어 내려가 오케스트라석 앞까지 이르렀다. 대통령은 방탄으로 되어 있다는 연단 뒤로 몸을 숨겼다.

범인은 연단 왼쪽에 꼿꼿이 앉아 있던 육 여사를 향해 두 발을 쏘았다.

육 여사가 좌석에 앉은 채 고개를 오른쪽으로 떨구었다. 범인은 현장에서 체포됐다.

범인은 재일교포 2세 문세광(당시 23세)이다.

본적은 경남 진양군 대평면 산촌리 3-24, 살고 있는 곳은 일본 오사카. 여권은 일본인 요시이 이름으로 된 것이었고 비자는 관광비자였다.

이날 결국 육 여사는 깨어나지 못하고 49세 나이로 유언 한마디 없이 오후 7시에 운명한다. 전 국민이 슬픔에 빠졌고 울었다. 전국에 애도와 추모 물결이 휩쓸었다.

할머니와 부녀자들은 분향소에 와서 엎드려 마치 가족이라도 죽은 듯 애통해했다.

이틀 만에 일반 조문객 수는 10만 명을 넘어섰다. 전국 도청마다 마련된 분향소에도 지방 조문객들이 몰려들었다. 이런 추모 물결은 1975, 76년까지 이어진다. 여사가 숨진 지 2년이 지난 76년 7월 3일에는 묘소를 참배한 인원이 1000만 명을 넘어섰다.

육 여사가 운명한지 올해로 40년이 되는 해이다. 그의 어린 딸은 그의 빈자리를 메우는 퍼스트레이드를 대행했고, 지금은 대통령이 됐다.

문세광의 의혹들

육영수 여사의 저격사건에 대한 의혹들은 아직도 풀리지 않은 숙제다.

수사본부는 현행범 문세광의 총격에 육 여사가 변을 당한 것으로 결론지었다. 하지만 문세광의 총알이 직접 육 여사를 맞혔는지, 대통령을 왜 암살하려고 했는지에 대해선 아직도 의문이다.

당시 박대통령의 경호는 삼엄했다. 3·1절이나 광복절처럼 대통령이 참석하는 기념식은 테러리스트의 표적이 될 수 있어 경호가 엄중했다.

그해  3·1절 기념식에 참석한 외국대사의 부인의 핸드백조차 물품보관소에 보관토록 했다. 대사부인회에서 항의하는 바람에 경호과장이 2개월 간 정직처분을 받았다. 이 일이 있은 후 외국인에 대한 경호가 느슨해졌다. 문세광이 일본대사관 직원 행사를 하면서 무사통과할 수 있었다.

당일 행사의 경호에는 청와대 경호실의 3개 과 중 경호2과 병력 50명이 동원됐다. 경찰은 좌석 곳곳에 배치된 사복근무자 88명 등 총 546명이 동원됐다.  문세광이 총을 쏘며 질주한 B열과 C열 사이의 통로에는 용산경찰서 소속 전기환(전두환 형)등 12명의 경찰이 배치됐다. 어느 누구도 문세광을 저지하지 않았다.

문세광의 발을 걸어 넘어뜨린 것은 경호원이 아니라 독립유공자 가족으로 참석한 어느 세무서 공무원이다. 누군가 문세광을 먼저 발견했다면 육 여사가 변을 당하는 일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이 때문에 경찰 40여명의 목이 달아났다.

며칠 뒤 대통령저격사건수사본부는 수사 결과를 발표하고 “문세광이 조총련계 재일교포로 북괴 공작선 만경봉호에 승선했을 때 북괴 공작지도원으로부터 ‘박 대통령 저격사업은 김일성 주석이 직접 지시한 사업이니 생명을 걸고 성공시키라’는 지령을 받았다”고 밝혔다.

수사본부의 발표 이후 음모론이 제기됐다. 철통같은 경호가 문세광에 어이없이 뚫렸기 때문이다. 또한 문세광은 재판이 끝나자마자 사형에 처한 것도 여러 가지 면에서 음모론을 부추겼다.

당시 합동수사본부의 요원이었던 서울시경 감식계장 이건우 경감은 1989년 월간 <다리>와의 인터뷰를 통해 육영수 여사는 문세광이 쏜 탄환에 맞아 숨진 것이 아니라는 충격적인 주장을 했다.

2005년 초에는 문화방송(MBC)의 <이제는 말할 수 있다>와 에스비에스(SBS)의 <그것이 알고 싶다>가 비슷한 시기에 각각 2부작으로 육영수 여사 피살사건의 의혹을 다뤘다.

로스앤젤레스(LA) 타임스 도쿄특파원 샘 제임슨은 한국 텔레비전에서 방영되었던 흑백 영상이 아닌 다른 각도에서 촬영한 새로운 컬러 영상을 공개했다. 이를 토대로 육영수를 쏜 것은 무대 오른쪽에서 뛰어 들어 온 경호원이었다는 주장을 폈다.

그들의 주장에는 허점이 있었다. 위조 번호판 문제, 경호실의 공모설, 피격 부위, 총격 시의 섬광 등이다.
지난 2005년 문화방송과 에스비에스는 각각 당시의 녹음자료를 음향전문가 배명진 숭실대 교수에게 분석을 의뢰했다.

문세광의 총이 아닌 제3의 총에서 발사된 총성이 발견됐다는 분석보고가 나왔다. 문세광의 왼쪽 후방에 있던 경호원이 문세광을 향해 발사한 총이 빗나가 육영수 여사를 맞혔다는 것.

배명진ㆍ김명숙 숭실대 교수는 공동저서<소리로 읽는 세상>을 통해 방송사의 의뢰로 육 여사가 피격당한 1974년 8ㆍ15 광복절 기념식 현장 중계방송 음성을 정밀 분석했다. 세간에 알려진 7번 총성이 울린 것과 달리 세 번째 총성에 묻혀 잘 들리지 않았던 또 다른 총성을 추가로 발견했다.

배 교수는 “이 총소리가 세 번째 총성 탓에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다면 다른 위치에서 발사됐을 것”으로 추정했다. 배 교수는 국내 최초로 소리공학 분야를 개척했고 20년 넘는 세월 동안 관련 논문 1000여 편을 발표해 1999년 `신지식인`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이날 문세광이 박정희 대통령을 저격하기 위해 쏜 총알은 모두 네 발. 나머지는 경호원들의 총에서 발사됐다. 이를 근거로 배 교수는 문세광이 아닌 경호원이 쏜 총탄에 의해 육 여사가 사망한 것으로 결론을 냈다. 당시 수사본부는 정밀한 음향 분석과 영상 프레임별로 육영수 여사의 반응을 분석하지 않았기 때문에 세 번째 총성 사이에 감춰진 또 다른 총성을 찾지 못한 것이다.

그렇다면 육 여사는 누구의 총에 맞아 사망한 것일까.

지금까지 밝혀진 바로는 B열 후방에는 백상규와 김용완 두 경호원이 배치되었다. 이들은 문세광이 첫 발을 오발했을 때 총성을 인식하지 못했고 범인이 뛰어나가는데도 범인을 제지하거나 소리조차 지르지 않는 등 아무런 경호조치를 취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비난을 받았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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