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들, 사외이사 오히려 악용...‘갑옷’준 셈

대기업 사외이사 자리는 ‘관피아’가 장악했다. ‘관피아’에 대한 사회적 비판은 갈수록 강해지고 있지만 ‘바람막이’용 관료출신 사외이사를 찾는 대기업은 더 늘어난 것으로 조사됐다. 대기업 사외이사 10명 중 4명이 관료출신이다. 특히 이들 중, 국세청과 감사원 등 핵심 권력기관 출신이 늘어나 고위 관피아로 외풍을 막으려는 대기업의 의도가 보인다.

핵심 권력기관 출신 대환영

정부가 대대적인 ‘관피아’(관료+마피아)척결을 외쳤지만 대기업의 관피아 러브콜은 더 심해졌다. 올해 49개 그룹 사외이사의 관료 출신 비중은 37%로 전년보다 2%포인트 높아졌다. 이 중 법원·검찰을 비롯해, 국세청·공정거래위원회·감사원 등 기업 경영과 밀접한 4대 핵심 권력기관 출신이 60% 이상을 차지했다.

25일 기업경영성과 평가사이트인 CEO스코어에 따르면 상호출자제한 49개 기업집단 238개 상장사의 사외이사들의 출신 이력을 조사한 결과 총 750명 중 36.9%인 277명이 관료 출신인 것으로 집계됐다. 대기업 사외이사 10명 중 4명이 ‘관피아’인 셈이다.

지난해와 비교하면 전체 사외이사 수는 7명 줄었지만, 관료 출신은 268명에서 9명이 늘었다. 관료 출신 사외이사 비중도 35.4%에서 1.5%포인트 상승했다.

학계와 재계 출신 사외이사는 381명에서 367명으로 14명 줄었는데 그 빈자리를 관료 출신 인사들이 차지했다. 정부에서 관피아 사외이사를 통해 기업으로 이어지는 유착 고리는 여전하다.

특히 올 들어 대기업 사외이사는 국세청(관세청)과 감사원 출신이 11명(20%) 이상 늘었다. 이는 핵심 권력기관 출신에 대한 선호도를 보여준다. 4대 권력기관 출신 인사는 165명에서 173명으로 늘었고, 관료 사외이사 내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61.6%에서 62.5%로 높아졌다.

법조(법원·검찰) 출신 인사가 84명으로 가장 많고, 세무 50명, 공정위 24명, 감사원 15명 순이었다. 올해 들어 법조 출신 사외이사는 4명 줄어들었지만 세무당국 출신이 8명, 감사원 출신이 3명 늘어난 점이 눈에 띄었다.

관피아 ‘원톱’이라 “신세계”

그룹별로는 신세계의 관료 출신 사외이사 비중이 가장 높았다.

7개 상장사 17명의 사외이사 중 무려 82.4%인 14명이 관료 출신 인사다. 세월호 참사 이후 관피아에 대한 부정적 여론이 불거지고 법 개정까지 이뤄지고 있는 가운데 신세계는 굳건한 ‘관료 출신 선호’를 보였다.

신세계그룹은 사외이사가 전원 감사원, 공정위 등의 관료 출신으로 이뤄진 계열사가 네 곳이나 된다. 신세계(대표 장재영), 신세계I&C(대표 윤수원), 신세계푸드(대표 김성환), 이마트(대표 이갑수) 등 4개 계열사가 그 주역으로, 총 10명의 사외이사가 ‘모두’ 감사원·공정위·법조·세무 등 관료출신 인사로 이뤄졌다. 이는 유통 사업 특성상 규제가 많은 만큼, 사외이사로 ‘바람막이’용 권력기관 출신을 선호했기도 때문으로 풀이된다.

그러나 신세계그룹 측은 “내수기업이라 국내 사정에 밝은 공무원 출신들이 사외이사로 선임된 것”으로 해명했다고 전해진다. 해외 수출을 하는 제조업체였다면 기술직·연구직·해외영업직 전문가를 사외이사로 선임했겠지만, 내수기업이다 보니 결국 국내 사회적 이슈에 대해 잘 알고 세금이나 법과 관련된 전문가를 사외이사로 영입한 것이라고 설명이다.

신세계에서 사외이사로 활동하고 있는 관료출신 인사는 김종신 전 감사원 정책국장, 손영래 전 국세청장, 손인옥 전 공정위 부위원장, 조근호 전 서울북부지검장 등 4명이고, 이마트의 박종구 전 감사원 감사위원, 문창진 전 보건복지부 차관, 박영렬 전 수원지검 검사장, 전형수 전 서울지방국세청장 등 4명도 모두 관료 출신이다.

관료출신 중에서도 감사원 공정위 검찰 국세청 등 소위 4대 권력기관 출신들 일색인 점도 이채롭다.

2위는 영풍으로 13명 중 9명(69.2%)이 관료 출신 인사였고, 현대산업개발(66.7%), 롯데(65.5%), 동국제강(63.2%), CJ(60.7%) 등이 60% 이상으로 뒤를 이었다.

현대자동차, 한국타이어, 세아, 삼천리는 관료 출신 사외이사가 딱 절반을 차지했고, 두산(48%), OCI(46.7%), 현대(46.2%), SK(44.8%), 효성(42.9%), 현대중공업(40%), 아모레퍼시픽(40%), 태영(37.5%)도 평균보다 높은 비중을 기록했다.

반면 하이트진로, 이랜드, 미래에셋, 대우조선해양은 관료 출신 사외이사가 한 명도 없어 대조적인 모습을 보였다.

불멸의 ‘고위’ 관피아...왜?

대기업 그룹 사외이사 중에는 검찰총장, 장관 등 고위 관료 인사도 대거 포진해 있다.

두산엔진 정구영(23대 검찰총장) 사외이사를 비롯해 금호산업 김도언(26대), 삼성전자 송광수 사외이사(33대), CJ오쇼핑 김종빈(34대) 등이 역대 검찰총장을 지냈다.

올 들어 사외이사 진출이 더욱 활발해진 국세청 및 관세청 출신 인사로는 HMC투자증권 임성균(광주지방국세청장), SK네트웍스 허용석(관세청장), LS산전 이병국(서울지방국세청장) 등이 대표적이다. 롯데쇼핑과 KT&G의 사외이사를 겸직 중인 박동열도 대전지방국세청장 출신이다.

동부제철 원유승, 현대엘리베이터 박의명은 감사원 국장 출신으로 올해 주총에서 사외이사로 선임됐다.

삼성생명보험 박봉흠(기획재정부), 삼성증권 김성진(해양수산부), SK C&C 이환균(국토교통부), SK이노베이션 김영주(산업통상자원부), GS 이귀남(법무부), KT 김종구(법무부), CJ대한통운 이기호(고용노동부), 고려아연 이규용(환경부), 코오롱인더스트리 김성호(보건복지부), 삼천리 곽결호(환경부) 등은 장관직을 거쳤다.

관피아가 따가운 시선을 받고 있음에도, 대기업들이 관료 출신들을 대거 사외이사로 영입하는 이유는 이는 최근 들어 금융·사정 당국의 조사나 정부의 각종 규제 등 공권력에 대한 방어 수단으로 활용하려는 의도 때문이라고 CEO스코어는 분석했다.

사외이사는 대주주 일가의 독단경영과 전횡을 차단하기 위해 도입한 제도지만 기업이 오히려 외풍을 막는 '바람막이'로 악용하고 있다. 한성대 행정학과 이창원 교수는 “사외이사는 대기업 오너에 대한 견제기능이 목적이었지만 지금은 기업에 대한 방패 역할로 전락했다”고 지적했다.

공정위나 세무당국처럼 기업경영과 밀접한 기관 출신 인사는, 사외이사 임용에 제약을 둬야 한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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