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신용평가회사와 기업 간 부적절한 유착관계가 표면에 드러났다. 금융감독원은 회사채 발행을 앞둔 기업의 ‘등급 쇼핑’과 신평사의 ‘등급 장사’를 적발하면서 상당한 후폭풍이 예상된다. 신평사들이 등급 부풀리기를 할 수 밖에 없는 ‘구조적 문제’와 함께, 신평사에 대한 소송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우선적으로 ‘갑과 을’의 관계를 깨야한다는 지적이 거세다.

“높은 등급 줄테니 일감 다오”

18일 금감원은 나이스신용평가 한국기업평가 한국신용평가 등 국내 3대 신평사가 자본시장법을 위반한 사실을 적발했다. 이어 임직원들에게 '문책경고' 이상의 중징계를 통보했으며 해당 임원들은 3년간 금융권 재취업이 제한된다.

금감원의 이번 특별검사는 대규모 피해자를 양산한 동양그룹 사태를 계기로 이뤄졌다. 당시 신평사들은 동양그룹이 기업어음(CP)을 무더기 발행 후 법정 관리 신청을 하고 나서야 신용등급을 D로 강등했다.

금감원 조사 결과 A신평사는 B기업 신용등급을 강등할 예정이었지만 “곧 회사가 지급보증한 자산유동화기업어음(ABCP) 발행 계획이 있으니 도와달라”는 A사 요청을 받고 ABCP 발행 이후로 등급 조정을 늦춘 것으로 알려졌다. 결국 B사는 낮은 금리에 자금을 조달했지만, 해당 ABCP를 산 투자자는 이후 신용등급 하락으로 손해를 봤다. C신평사는 “좋은 등급을 줄 테니 신용평가 업무를 맡겨달라”고 기업들에 제안한 사실이 드러났다.

자본시장법은 신평사들이 엄정한 잣대로 신용등급을 매길 수 있도록 평가대상 기업에 미리 신용등급을 알려주는 행위 등을 엄격히 금지하고 있다. 그러나 기업들이 예상 신용등급을 묻고 가장 높은 등급을 제시한 신평사와 계약을 맺는 일이 빈번한 것으로 나타났다. 한 관계자는 “이런 일들이 암암리에 이뤄지고 있는데 이제야 수면에 드러난 것”이라고 말했다.

쟁탈전 만든 고객의 선택권

금융감독원의 특별검사로 국내 신용평가회사와 기업 간 부적절한 유착관계가 밝혀지면서, 기업과 신평사 사이에 형성된 ‘갑과 을’의 관계도 뚜렷하게 드러났다.

신평사와 기업이 유착관계에 빠지게 원인은 ‘구조적 문제’라는 것이 투자은행(IB) 업계의 분석이다. 기업은 높은 신용등급을 받아야 낮은 이자율로 자금을 빌릴 수 있고, 신용등급 평가수수료로 먹고사는 신평사는 기업과 좋은 관계를 유지해야 생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신평사가 겪고 있는 모순은, 엄정하게 평가해야 할 대상이 회사의 목줄을 쥔 고객이라는 것이다. 최근 몇 년 사이 힘의 균형이 기업 쪽으로 급격하게 기울면서 기업이 ‘갑’이 되고 신평사는 ‘을’이 됐다.

관계자는 “등급인플레이션 현상과 기업의 상황이 한계상황에 다다른 뒤 부랴부랴 신용등급을 강등하는 등 소위 '뒷북 평가'가 바로 이런 관계에서 비롯됐다"며 "이는 한 신평사의 문제나 임원 한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구조적인 문제"라고 지적했다

회사채 발행을 준비하는 기업은 신평사 3사 중 2개사에서만 신용등급을 받으면 되기 때문에 특정사를 배제할 수 있는 선택권을 갖게 된다. 그 결과, 신평사가 먼저 기업에 접근해 “좋은 등급을 줄테니 일감을 달라”고 요구하는 상황이 벌어진다.

또 신평사와 기업 간 유착에 힘을 보탠 것은 국내 신용평가 시장이 나이스신용평가 한국기업평가 한국신용평가 등 3대 신평사의 과점체제로 이뤄졌다는 점이다. 지난해 814억원 규모인 국내 신용평가 시장은 나이스신평(33.9%) 한기평(32.8%) 한신평(33.2%)이 비슷한 규모로 나눠 갖고 있다. 점유율 경쟁이 치열할 수 밖에 없다. 그 결과, 신평사들은 ‘일감수주’를 얻기 위해 쟁탈전으로 뛰어들었다.

투자자들 “뭘 보고 신용하나?”

신평사와 기업 간 유착관계가 ‘신용등급 인플레’ 현상에도 어느 정도 영향을 준 것으로 업계는 파악했다.

금감원에 따르면 지난해 회사채를 발행한 기업 가운데 A등급 이상을 받은 업체 비중은 77.4%였다. 10곳 중 7~8곳이 우량등급 판정을 받은 것이다. 2003년 A 이상 등급 비중이 41.7%였던 점을 감안하면 10년 만에 두 배 가까이 상승한 셈이다.

국내 주요 증권사 채권 발행 담당 임원은 “신평사가 기업 등급을 마구잡이로 올리다 보니 투자자 입장에선 A등급 회사채도 불안하다는 얘기가 나온다”고 말했다. 한 담당자도 "회사채를 매입할 때 신용평가보다는 업계에 떠도는 정보를 더 주의깊게 살펴본다"며 "개인투자자들은 이런 정보를 접하기 어려워 손해를 뒤집어쓰게 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신평사와 기업 간 검은 커넥션으로 피해를 본 투자자들이 금감원 검사 결과를 토대로 신평사에 소송 등을 낼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이는 각종 손해배상 소송에 휘말리고 있는 글로벌 신용평가사들의 사례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위험자산 등에 과도하게 높은 신용등급을 부여해 투자자 손실을 방치했다는 것이다.

2012년 11월 글로벌 신용평가회사인 S&P가 위험도가 높은 금융 상품인 부채담보부증권(CDO)에 지나치게 높은 신용등급을 매겨 투자손실을 유발했다며 호주지방의회가 소송을 냈다. 지난 6일 호주법원은 “S&P는 해당 CDO 상품을 설계할 때부터 금융 상품 신용도가 AAA등급에 해당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최고등급을 매겼다”며 “S&P는 3060만달러(약 345억원)를 물어주라”고 판결한 원심을 확정했다.

미 법무부는 지난해 2월 S&P가 서브프라임 모기지의 위험성을 알고도 수수료를 챙기기 위해 CDO에 최고등급인 AAA등급을 평정했다며 50억달러(약 5조3800억원) 규모의 소송을 제기했다. 미국의 19개 주정부도 소비자보호법 위반을 이유로 S&P를 제소했다. 지난해 7월 캘리포니아 산타아나 지방법원은 법무부의 손을 들어줬다. S&P뿐 아니라 무디스, 피치 등 대형 글로벌 신평사들도 줄줄이 소송을 당하고 있다.

한 국내 증권사 크레디트 담당자는 “신평사에 대한 불신이 높아지고 있다. 국내 신평업계에선 아직 외국처럼 소송사태는 일어나지 않고 있지만 ‘등급 부풀리기’에 대한 의혹이 큰 만큼 신뢰회복에 적극 나서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신평사들의 정보 공개를 더욱 강화해야 한다는 의견도 나오고 있다. 신평사들은 부도율 산정 기준도 제각각이라 외부인들이 통일된 잣대로 업무 실적을 평가하기 힘들다는 지적이다.

그룹이나 계열사의 지원 여부를 빼고 해당 기업의 재무상태만 따져 신용등급을 부여하고 이를 공개하는 ‘독자신용등급’을 조기 실시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독자신용등급은 내년 도입 예정이다.

저작권자 © 공정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