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준하도급계약서, 건설업계 경제민주화의 시작

최근 가장 많이 회자되는 단어 중 하나가 ‘경제민주화’인 듯 싶다. 지난 해 동반성장과 공생이 사회적 화두가 되고, 대선 기간 동안 대선주자들이 경제민주화에 대한 여러 공약들을 쏟아내면서 어느 새 경제민주화는 익숙한 단어가 되어버렸다.

얼마 전 출범한 박근혜 정부도 ‘민생경제 회복과 창조경제 구현’이라는 정책목표 달성을 위해 경제민주화를 일자리 창출, 민생안정, 리스크관리 강화와 함께 주요 경제정책 방향으로 선정한 바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몸 담고 있는 건설업계에는 경제민주화의 봄이 왔다고 할 수 있을까? 이 물음에 자신있게 “예”라고 답할 수 없는 것이 서글픈 현실이다.

건설산업의 생산체계는 발주자 - 원도급 - 하도급 - 2차협력사로 이어지는 수직적 방식이고, 건설공사는 수 많은 공정들로 이루어져있어 다른 산업에 비해 많은 수의 협력사들이 참여하는 산업이다. 또한, 협력사들이 각 공정별로 시공을 하기 때문에 협력하도급사의 시공결과가 공사품질과 직결된다. 따라서, 건설산업이야말로 어느 산업보다도 경제민주화가 가장 절실한 산업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현실은 어떠한가? 국내외 경제여건 악화와 부동산 경기 침체로 건설수주 물량은 감소하고, 최저가 낙찰제 시행, 표준품셈 하향 현실화 등으로 공사채산성은 날로 악화됨에 따라 유동성 고갈과 수익성 악화에 경영압박을 느끼는 원도급업체들을 중심으로 불공정 하도급 행위는 오히려 확산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하도급업체가 조금이라도 어려움을 겪게 되면, 지원을 통해 협력관계를 유지해 나가기는커녕, 기계 부속품처럼 협력 하도급업체를 갈아치우는 원도급업체들도 비일비재하다. 끈끈한 원-하도급관계는 옛말이 된지 오래다.

필자가 몸 담고 있는 전문건설공제조합(이하 ‘조합’이라 함)은 하도급 공사를 주로 담당하는 전문건설업계에 보증과 융자, 공제(보험) 등의 금융서비스를 제공하는 건설금융기관이다. 조합의 주 업무는 보증이다. 조합원인 전문건설사들이 건설공사를 수행함에 있어 원도급사에게 각종 공사계약이행을 하지 못하게 되면 보증기관인 조합이 대신 책임을 진다. 필자가 본부장을 맡고 있는 조합의 채권관리본부는 계약불이행이라는 보증사고 발생시 원도급사들에 대한 보상을 주업무로 하고 있어, 우리 건설업계의 원-하도급 간 관계의 실상을 적나라하게 볼 수 있는 곳이다.

하도급 협력사와의 상생을 위해 노력하는 원도급사들도 많이 있지만, 불공정 하도급으로 협력하도급사들을 쥐어짜는 원도급사들을 보면 안타까울 따름이다. 보상을 하는 과정에서 하도급계약서를 보게 되면, ‘이런 계약서에 왜 도장을 찍었나’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하도급사에게 불리한 계약조항들로 가득 찬 하도급계약서들이 많다. 하지만, 하도급사는 ‘을’이니, 부당한 줄 알면서도 계약서에 도장을 찍을 수 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을’이 ‘갑’에게 계약내용이 부당하니 바꿔달라고 요구하기를 바라는 것은 누가 봐도 어불성설일 것이다.

자유민주주의 사회에서 계약자유의 원칙이 지켜져야 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계약 당사자 간의 관계상 상호 공정한 계약체결이 불가능한 구조라면 법과 제도가 불합리를 해결해줘야 할 것이다. 주택임대차보호법이나 상가건물임대차보호법에서 임차인에게 불리한 약정은 효력이 없다는 강행규정을 두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런 취지로 공정거래위원회는 원하도급간 공정한 계약을 유도하기 위해 하도급 거래공정화에 관한 법률을 통해 표준하도급계약서 사용을 권장하고 있다. 하지만, 말 그대로 ‘권장’이다. 갑이 표준하도급계약서를 사용하지 않는다고, 을이 표준하도급계약서로 계약체결을 하자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인데도 말이다.

표준하도급계약서 사용은 의무가 되어야 한다. 계약자유의 원칙이 지켜져야 한다면 공공발주처부터라도 표준하도급계약서의 사용을 의무화해야 할 것이다. 이를 통해 표준하도급계약서를 사용하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지는 문화를 정착시켜야 할 것이다. 또한, 표준하도급계약서에 부당한 특약을 추가하는 경우 부당한 특약에 대해서는 그 효력을 부인할 수 있는 법적 근거를 마련해야 할 것이다.

경제민주화는 중소기업과 소상공인, 하도급자와 같은 경제적 약자들도 공생공존할 수 있는 질서를 정립하는 것이다. 그러한 질서정립의 출발점이 공저한 계약이기에 표준하도급계약서가 경제민주화를 위한 시작점인 것이다.

 

저작권자 © 공정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