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를 먹으면 자신의 얼굴을 책임져야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얼굴은 사람의 인생역정을 고스란히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생을 잘 산 사람은 황혼에 잔잔한 표정이 남는다고 하더군요

그렇지 않은 사람은 나름대로의 표정이 남겠지요.

혹시 오해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새삼 이런 뜬금없는 얘기를 꺼내는 이유가 따로 있는 게 아닌가 하고 말입니다.

관상에 관심이 생겨서는 결코 아닙니다.

어느 날 아침이었습니다.

으레 하던 대로 잠에서 덜 깬 채로 냉수 한 잔 마시고 화장실로 향했습니다.

일을 보고 습관처럼 면도를 했습니다.

벽면의 거울을 바라보며 면도날만 갈아 끼우는 면도기를 들고 있다 깜짝 놀랐습니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낯설었기 때문입니다.

안경을 벗은 웬 생소한 사내의 얼굴이 다가왔습니다.

평소 거울을 통해 얼굴을 꼼꼼히 바라보는 스타일이 아닙니다.

면도할 때도 인중 주변이나 턱만을 바라보거든요.

거울에 비친 사내의 얼굴 모습은 무척이나 부자연스러워 보였습니다.

좀처럼 나의 존재라는 자각이 들지 않았습니다.

솔직히 ‘이거 뭐야!’하는 느낌이었습니다.

한참을 멍하니 바라보아도 필이 오지 않았습니다.

비현실적인 존재가 인상을 찌푸린 채 노려보고 있었거든요.

일터로 나가는 차안에서 시선이 자꾸 거울로 가더군요.

후미를 비추는 실내 거울은 안경 쓴 두 눈만 보여주었습니다.

여전히 현실감을 잃어버린 낯선 얼굴이었습니다.

하루 종일 기분이 찜찜했습니다.

자신의 얼굴을 상실한 몸뚱이가 움직이고 있는 듯했습니다.

어디서 본 것 같은 기시감마저 들지 않으니 무척 당혹스럽더군요.

요의를 느끼지 않으면서도 화장실을 들락거렸습니다.

거울 속의 낯선 얼굴이 궁금해졌기 때문입니다.

대책이 없는 것은 기억마저 사라졌다는 사실입니다.

내 얼굴 모습이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습니다.

물론 자신의 얼굴을 기억하며 사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겁니다.

조금씩 변하기는 해도 항상 거기 그 자리에 있으니까요.

그리고 이미지는 머리에 터를 잡고 있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도무지 생각이 나지 않았습니다.

주민증을 까고 면허증을 뚫어지게 바라보아도 낯선 얼굴 뿐 이었습니다.

마치 녹음된 자신의 목소리를 처음 들었을 때처럼 묘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나 같지 않은 목소리가 분명히 내가 했던 말을 지껄이고 있습니다.

잠시 헷갈리다가 체념해본 기억이 있을 겁니다.

이명과는 차원이 다른 불안한 심사가 몸을 감쌉니다.

그런데 목소리도 아닌 얼굴이라는 현실적 실체가 애매해 진 것입니다.

난감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프랑스 작가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신>이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그 속에 <좋은 거울>에 대한 얘기가 나옵니다.

이 얘기는 흔히 얼굴을 비쳐보는 거울의 의미를 말하고 있습니다.

누구를 만나 첫눈에 반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물론 사랑에 눈이 멀기 쉬운 젊은 선남선녀들의 얘기입니다.

그래도 그런 경험은 누구에게나 다 있을 겁니다.

베르베르는 이를 두고 <좋은 거울>을 발견하는 것이라 말합니다.

자신의 만족스런 상(像)을 만났을 때 그렇게 느낀다는 겁니다.

그런 상(像)을 만나면 상대의 시선을 보면서 자신을 사랑하려고 노력하게 된다고 합니다.

평행한 두 거울이 서로에게 기분 좋은 상(像)을 비춰주게 되는 거지요.

그것은 거울 두 개를 마주보게 놓는 것과 같습니다.

거울이 서로 마주보면 거울 속에 거울이 비치면서 같은 이미지가 무수하게 생겨나겠지요.

그렇게 되면 사람은 다수의 존재로 바뀌게 될 것입니다.

베르베르는 이것을 무한한 지평이 열리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럴 때 사람은 자신이 아주 강하고 영원하다고 느끼게 된다고 합니다.

하지만 두 거울은 고정된 존재가 아닙니다.

살아 움직이는 생물처럼 변하게 됩니다.

사람이 성장하면서 키만 자라는 것이 아니라 생각도 자라는 이치와 마찬가지입니다.

서로 첫눈에 반한 연인도 똑같습니다.

자라고 성숙하고 진보합니다.

처음엔 서로 마주보고 같은 곳을 향해 갑니다.

그러나 전진하면서 향하는 방향과 속도는 달라질 수 있습니다.

결국 상(像)은 서로 어긋나게 되고 결별이 찾아오게 되는 것입니다.

자신을 비춰주던 거울이 사라지는 순간이 다가오는 겁니다.

그것은 종말일 뿐 아니라 상(像)을 잃는 길입니다.

베르베르는 결론적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상대의 시선에서 자신을 보지 못하면 내가 누구인지 모르게 된다고.

맞는 말입니다.

실체적 타인이 아니더라도 거울에 비친 것은 나 아닌 상대일 수 있습니다.

거울에 비친 자신을 알아보지 못한 것에는 분명 이유가 있을 겁니다.

언제부터인지 정확하지는 않지만 조금씩 자신을 잃어가고 있었습니다.

산 설고 물 설은 변방에서 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었던 겁니다.

디딘 땅이 무르고 척박했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진정한 농사꾼은 땅을 탓하지 않습니다.

박토도 옥토로 바꾸는 끈기가 있습니다.

하루를 마디로 쪼개서 하루하루를 넘겼습니다.

시간을 마디로 나누어서 밀어내는데 급급했습니다.

오늘과 별로 다를 것 같지 않은 내일을 희망하지도 않게 되었습니다.

마디로 갈라진 시간만 강물에 흘려보내는 일상의 반복이었던 셈입니다.

잃어버린 거울 속의 얼굴을 되찾아야 하겠습니다.

곰곰 생각해 보고 있습니다.

과연 어떻게 하면 진짜 나 같은 이미지를 비치게 할 수 있을까를.

당장의 답은 떠오르지 않습니다.

그래도 언뜻 스치는 생각은 있습니다.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면서 넋 놓고 있지 말자는 것입니다.

베르베르의 말처럼 불행을 줄이려 노력하기 보다는 행복을 창조해야 합니다.

우선 정리를 하고자 합니다.

내가 무엇을 하고 싶어 하고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따져보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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