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를 흠뻑 맞은 벚꽃을 보신 적이 있나요.

색을 단정하기가 애매한 벚꽃이 지천인 계절입니다.

이맘 때 쯤 변방의 아침은 벚꽃을 바라보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4.11 총선 투표일이었습니다.

일찍 투표를 마치고 일터로 나가려 새벽에 일찍 일어났습니다.

전날 내린 비가 도로에 깔려있었습니다.

낮게 내려앉은 구름과 안개 기운이 대기를 감싸고 있더군요.

투표시작 시간인 6시에 맞추기 위해 집을 나섰습니다.

지하 주차장에서 지상으로 올라오는 순간 눈으로 벚꽃이 밀려 들어왔습니다.

아파트 인근에도 벚꽃나무가 즐비하기 때문입니다.

물방울을 이고 있는 벚꽃의 이미지는 기묘한 느낌을 주었습니다.

낮게 깔린 공기의 밀도를 짊어지고 있는 듯해 보였습니다.

그런데도 꽃과 대기가 적정한 거리를 둔 터라 균형을 맞추고 있었습니다.

대기 중에 서있는 나무 가지에 달린 꽃 봉우리가 홀로 붕 떠 있더군요.

유원지 입구에서 아이들을 유혹하는 솜사탕이 연상됐습니다.

비중이 높은 공기와 깃털처럼 가벼운 꽃 봉우리는 언뜻 어긋나 보였습니다.

그럼에도 기묘한 아름다움을 주고 있었습니다.

사실 평소 꽃이 예쁘다거나 아름답다고 부러 생각하는 스타일은 아닙니다.

그저 거기 있기에 바라볼 뿐 찾아보지는 않거든요.

어느 날 문득 피었다가 예고도 없이 사라지는 꽃의 숙명에 안쓰러움을 느끼기는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꽃의 문제로 치부하고 더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특히 벚꽃에 대해서는 일종의 편견을 갖고 있기도 했습니다.

그것은 아마도 주입식 교육 탓이었을 겁니다.

일본에 대한 거부감이 벚꽃에 대한 편견으로 자리 잡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쿠라라고 부르는 벚꽃은 일본을 의미했습니다.

의미도 부정적인 것이었음은 물론이지요.

그러나 이제는 벚꽃에 대한 편견을 내려놓게 되었습니다.

변방으로 내려온 이후 봄의 길목에서 만났던 벚꽃이 적지 않은 위안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벚꽃 필 무렵’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이 말을 금세 알아듣습니다.

실제로 ‘무렵’이라는 애매한 말이 특정되는 시기가 분명 있거든요.

사는 곳은 울산이지만 일터는 행정구역상 경주에 속해 있습니다.

당연히 이러저러한 일로 경주 시내를 자주 가게 됩니다.

매년 이 무렵이면 4차선의 7번 국도를 달리는 것이 푸근한 느낌을 줍니다.

양쪽 도로가의 벚꽃나무들이 봉우리를 터뜨리기 때문이지요.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민 나무가 옷을 차려 입는 과정을 살피는 재미가 쏠쏠합니다.

그러다 보면 어느 날 하루 밤 사이에 화려하게 치장한 모습을 보게 됩니다.

시간의 흐름을 느끼게 하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 둘 도로에 떨어진 꽃잎들이 굴러다닙니다.

바람결에 날리는 것이지만 스스로 춤을 추는 듯합니다.

꽃잎 알갱이들이 포도 위를 구르는 모습은 아주 경쾌한 기분을 들게 합니다.

물 위를 가르는 오리들의 튀는 동작이 연상됩니다.

마치 음악에 맞춰 군무를 하는 것처럼 보이거든요.

차는 앞으로 나가는 데도 꽃잎으로 분장한 오리들은 계속해서 나타납니다.

저만치 앞에서 다가오는 운전자를 향해 공연을 하는 것입니다.

아름다운 발레리나의 연기처럼 신비한 분위기가 연출됩니다.

경쾌한 리듬에 취해 포도에 머리를 박는 바보들도 생깁니다.

그러나 그들은 몸을 대기에 맡긴 채 리듬에 맞춰 떠다닙니다.

뜬금없이 자유란 저런 게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헛웃음을 날리며 정신을 차리긴 하지만 그리 싫지 않은 생각입니다.

이처럼 ‘벚꽃 필 무렵’이 되면 천년고도는 꽃으로 뒤덮입니다.

마치 전체가 꽃 울타리에 싸인 마을처럼 벚꽃에 갇힙니다.

꽃 속에 파묻혀 산다는 말이 실감날 정도입니다.

순간이지만 그럴 때면 일상의 고단함을 잊게 됩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흥얼거리기도 합니다.

강물 같은 노래를 품고 사는 사람은 알게 되지~

내내 어두웠던 산들이 저녁이 되면 왜 강으로 스미어

꿈을 꾸다 밤이 깊을수록 말없이 서로를 쓰다듬으며

부둥켜안은 채 느긋하게 정들어 가는 지를~

지독한 외로움에 쩔쩔매본 사람은 알게 되지~

그 슬픔에 굴하지 않고 비켜서지 않으며

어느 결에 반짝이는 꽃눈을 갖고

우렁우렁 잎들을 키우는 사람이야말로

짙푸른 숲이 되고 산이 되어 메아리로 남는다는 것을

안치환의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입니다.

사실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운지에 대한 확신은 없습니다.

그렇다고 꽃이 사람보다 아름답다고 할 수도 없습니다.

그래도 사람과 꽃의 삶은 어딘가 닮은 데가 있다는 생각은 합니다.

모진 시간을 견디다가 문득 피어버리기도 합니다.

피어보지도 못하고 사라지는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설사 활짝 피었다하더라도 어느 누구의 관심도 받지 못한 채 스러지기도 합니다.

어쩌면 잠깐이지만 경쾌한 리듬에 맞춰 도로 위를 구르는 꽃잎이 행복할 지도 모릅니다.

아스팔트에 머리를 박더라도 후회는 없을 테니까요.

뿌연 대기 속에 얹혀 있는 벚꽃을 보며 투표장으로 향했습니다.

첫 번째 투표자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하지만 길게 줄을 서 있더군요.

부지런한 사람들은 어디에나 숨어 있는 모양입니다.

받아 든 투표용지에는 이런 글귀가 인쇄돼 있었습니다.

‘투표하는 당신이 아름답습니다.’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잠시 투표와 아름다움이 무슨 관계가 있는지 생각해 보았습니다.

답이 쉽게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그 보다는 손석희 교수가 진행하는 <시선집중>의 슬로건이 더 와 닿았습니다.

<시선집중>이 선거기간 동안 내건 슬로건은 ‘정치인은 투표하는 유권자만 두려워한다’였습니다.

정곡을 찌른 정확한 표현이 아닐 수 없습니다.

총선은 끝났지만 앞으로도 정치인이 두려워하는 유권자가 되려고 합니다.

참여하는 것만으로도 세상을 조금씩 움직이게 할 수 있다고 판단하는 까닭입니다.

그러다 보면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운 세상’이 가까워 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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