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CB, 은행에 4890억유로 대출…1% 금리로 3년 만기
국채매입 부진 우려…은행들“자기자본확충이 우선”


유럽중앙은행(ECB)이 3년 만기 대출프로그램을 도입해 1%라는 초저금리로 무제한의 유동성 공급에 나서면서 유로존 재정위기 해소에 큰 역할을 할지 주목되고 있다.

ECB가 21일(현지시간) 523개의 유럽은행을 대상으로 3년 만기 장기대출(LTRO:Long Term Repo Operations)을 실시하면서 4891억9000만유로(약 737조원)를 배정했다. 블룸버그가 집계한 전문가들의 예상치 평균인 2930억유로를 크게 웃도는 금액이다. 1회 제공 물량으로는 최대수준이다.
이에 따라 기존에 최장 1년이었던 대출만기가 3년으로 늘어나게 되면서, 현재 자금압박으로 사실상 개점휴업 상태인 유럽은행들의 민간자금조달시장이 활기를 되찾을지 기대가 커지고 있다. 또 LTRO를 통해 유럽은행들이 국채매입에 나서 국채시장의 긴장이 완화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오고 있다.
임동민 KB투자증권 연구원은 “올해 4월 이후 늘어난 ECB 대출규모는 2008년 1차 금융위기 수준을 능가하며, 1.00%의 대출금리, 만기조건에 있어서도 더 확장적인 정책 대응”이라며 “은행부실 우려가 컸던 프랑스, 스페인, 벨기에의 단기국채 안정에 긍정적”이라고 평가했다. 그동안 ECB 대처가 미흡하다는 평가를 불식시킬만한 조치라는 것이다.
이어 그는 “이번 대출확대 이외에 내년 상반기까지 추가 기준금리 인하를 실시할 수 있으며, 이는 환율안정 등 전반적인 위험자산 회피심리를 완화시킬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LTRO 배정규모 발표가 유럽증시에 바로 긍정적인 영향을 주지는 못했다.
이번 조치에 대한 전문가들의 호평과 함께 발표 직후 안전자산으로 꼽히는 독일국채가 내려가는 등 위험자산 선호심리가 살아나는 듯 했으나 이날 유럽 주요 증시는 하락마감했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앞서 통화정책회의가 있던 8일부터 이번 조치가 알려지면서 투자자들의 기대감이 이미 증시에 반영됐다는 분석이다.
실제로 전날 스페인과 이탈리아가 낮은 금리로 국채를 발행하면서 성공적으로 자금을 조달했다. 스페인은 3개월ㆍ6개월물 국채를 각각 1.735%, 2.435% 금리에 발행했다. 지난달 발행 금리 5.11%와 5.227%에 비해 큰 폭으로 낮아진 수준이다.
부담이 적은 단기물인 영향이 있지만, 유럽은행들이 유동성공급에 고무되어 당초 발행목표 대비 6배에 달하는 180억유로를 투입했기 때문이다. 스페인 국채 유통수익률도 한 달 전보다 1.8%포인트 하락한 5.07%를 기록했다.
또 10년 만기인 이탈리아 국채도 금리가 0.44%포인트 낮아진 6.61%로 발행했다.

 

국채매입대신 우회적 유동성공급

 

LTRO는 유로존 국가 채권을 담보로 ECB에서 현재 1% 수준인 유로존 기준금리로 대출을 해주는 것이다. 즉 ECB가 싼 이자에 무제한으로 유동성을 공급함으로써 유럽재정위기를 진정시키기 위해 간접적으로 돈을 푼다는 의미다.
그동안 시장에서는 ECB가 유로존 재정위기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방안을 내놓기를 기대했다. 재정적으로 취약한 유럽국가들의 국채매입확대가 그 것이다.
그러나 마리오 드라기 ECB총재는 EU조약에 어긋난다는 점을 들어 부실국가의 국채를 직접 매입하는 데 반대한다는 입장을 밝혀왔다. 
지난 19일 마리오 총재는 “EU 조약은 중기적인 물가안정을 ECB의 정책목표로 명시하고 있으며 ECB의 통화적 자금조달(Monetary Financing)을 금지하고 있다” 고 말했다.
그 대신에 LTRO입찰에 은행들이 적극 참여하도록 독려하며 우회적으로 유동성 공급에 나섰다.
마리오 총재는 “중앙은행의 신용 제공에 의존한다고 해서 어떤 오명이 따라붙을 것으로 보지 않으며, ECB의 유동성 지원은 이용하라고 있는 것”이라며 “장기대출을 받은 돈으로 위험국에 대한 국채를 사거나 자신들의 은행채를 사도 된다”고 발언했다.
유럽은행들이 ECB의 지원에 기댄다는 이유로 시장에서 ‘낙인효과(stigma effect)’가 나타날 것을 염려하지 말고 유로존 신용경색을 해소하는 데 사용하라는 의미다.

 

국채시장에 자금 투입될까

 

도이치방크의 추정에 따르면 지난 2009년 6월 ECB가 1년 만기로 4420억유로의 유동성을 공급하자, 이 가운데 절반가량이 국채시장에 투입됐다.
따라서 ECB는 이번 LTRO가 이탈리아와 스페인 등 재정이 취약한 나라의 국채발행에 부담을 덜어줄 것을 기대하고 있다.
그러나 유럽은행들이 여전히 적지 않은 위험에 노출돼 있어 국채매입에 선뜻 나서기에는 어려울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하다.
예전에 비해 유로존 국채에 대한 불안감이 커진 만큼, 대형 은행들의 유로존 국채보유량과 투자자들의 우려가 비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 국채에 투자했다가 50% 헤어컷(채무탕감)을 당하기도 한 유럽은행들은 올해 이미 650억유로 규모의 유로존 국채를 처분했다.
한편 유럽은행감독청(EBA)이 이번 LTRO를 이용한 은행들의 국채매입은 불가하다고 밝힌 점도 걸림돌로 작용한다. 또 국채매입이 가능하도록 법률을 개정하더라도 유로존 재정위기의 근본적인 해결책은 되지 못한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LTRO가 당분간 유럽은행들의 숨통을 트이게 해주는 역할을 하겠지만 채무부담 자체를 줄여주는 것은 아니라는 점에서 유럽에 대한 우려감을 불식시키기에는 역부족이라는 평가다.
유럽은행들이 올 연말과 내년 1분기에 도래할 상당한 규모의 대출 만기를 앞두고 자기자본비율을 확대하는 데 주력할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따르면 유럽은행들에 이달부터 내년 3월까지 3720억유로의 채권 만기가 돌아온다. 파이낸셜타임스도 내년 유럽은행들이 채권만기에 따라 7200억유로를 조달해야한다고 전했다. 여기에 내년 6월까지 1147억유로 자본 재확충에 나서야 한다.
이다슬 한국투자증권 연구원은 “텔레그래프에 따르면 이번 LTRO 중 약 3천억 유로는 기존의 유동성 공급 프로그램의 재활용(Recycle)이라는 점도 큰 기대를 하기 힘든 이유”라며 “은행이 자금을 받아 펀딩 부족분을 만회하는 정도의 효과밖에 없을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다만 ECB가 초저금리인 1%에 돈을 빌려주기 때문에 이를 이용해 4~5%대인 고금리 국채를 사들여 차익을 노리는 이른바 ‘캐리 트레이드’는 다소 이뤄질 것으로 보인다. 이탈리아와 스페인의 국채수익률은 5~6%대를 기록하고 있다.
WSJ는 “수익성 악화에 직면한 이탈리아와 스페인의 중소형 은행들은 자국 국채 매입에 나설 수도 있다”고 내다봤다. 그러나 다른 나라의 국채를 매입하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선을 그었다.

 

유로존 신용등급 강등 가능성


지난 22일 이탈리아 의회가 추가 재정긴축안을 압도적인 표 차이로 통과시키면서 경제개혁안의 의회 승인 절차를 모두 마무리 지었다. 개혁안은 2013년 말까지 200억유로 규모의 재정적자를 줄여 균형재정을 달성하는 동시에 경제성장 촉진을 위해 100억유로 상당의 재정수단을 활용하는 방안을 담고 있다.
여기에 스페인의 은행 구조조정 추진과 더불어 EU 정상회의에서 합의된 새 재정통합안이 내년 1분기 중 통과되면 유로존 재정위기가 해소 국면을 맞이할 가능성이 커진다. 최종 해법인 유로본드 도입이나 ECB의 양적완화 조치 시행 조건이 갖춰지기 때문이다.
마리오 총재가 고수하는 입장과 달리 ECB의 양적완화 가능성이 제기되기도 했다.
로렌조 비니 스마기 ECB 집행이사는 23일 FT와의 인터뷰에서 “유로존에 디플레이션(경기침체 속 물가 하락) 위험이 커질 경우 ECB가 양적완화 조치를 취해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이러한 유럽리스크 해결 기대감이 커지는 동시에 유로존 국가들의 신용등급이 강등될 가능성이 악재로 자리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프랑스의 국가신용등급 강등이 임박했다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신용평가사 스탠더드 앤 푸어스(S&P)가 이달 초 프랑스를 부정적 관찰대상에 편입한 데 이어 수일 내로 신용등급 결정을 발표할 것으로 알려졌다. 피치도 등급 전망을 부정적으로 내렸으며 무디스는 내년 1분기 중에 전 EU 회원국의 신용등급을 검토할 것으로 밝힌 바 있다. 
전문가들은 S&P가 유로존의 신용등급을 그대로 유지할 경우 단기랠리를 기대할 수도 있지만, 예상대로 강등이 이뤄지면 그 충격은 상당할 전망이라고 내다봤다.
 

연말, 단기적 트레이딩 ‘추천’

 

유럽시장에 대한 우려감이 여전히 남아있는 가운데 국내 증시는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이 연구원은 “이번 조치를 통해 위기 국가 국채 금리가 하향안정화 되고, 은행의 원활한 자본확충이 이어진다면 가장 긍정적인 시나리오일 것이다. 그러나 잘 되지 않았을 때의 하방 리스크를 감안한다면 ‘마틴게일 베팅’이 될지도 모르는 일”이라고 말했다.
ECB의 이번 정책이 제한적인 효과에 그칠 수 있어 유로화 약세를 감안한 경기방어주 접근이 유효할 것이라는 전망이다.
아울러 시장상황을 주시하면서 단기적 트레이딩에 나서는 편이 유리하다는 분석도 있다.
오동석 이트레이드증권 투자전략팀장은 “드라기 총재의 의도와 다르게 유럽은행들이 싼 값에 자금을 조달하고 나서 유럽국가들의 국채나 은행채를 매입하지 않는 경우 유동성공급효과는 제한적일 것”이라고 판단했다.
이어 그는 “국내증시가 거래량은 줄고 지수 변동성은 상대적으로 커지는 전형적인 연말장세의 특징을 보이고 있다”며 “적극적인 매수보다는 시장상황에 따른 단기적 트레이딩을 추천한다”고 말했다.


*용어설명
마틴게일(Martingale) 전략-손실시에 레버리지를 늘려 앞선 손실 이상의 이익을 본 후 다
시 레버리지를 줄이는 방법으로 반복해 거래하는 트레이딩 전략을 말한다. 일례로 선물투자 시 한 계약으로 거래하다가 손실이 발생하면 두 배의 계약 수로 거래를 늘리고, 수익이 발생하면 다시 한 계약으로 줄여 거래하는 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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